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 - 범죄와 정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
하워드 제어 지음, 손진 옮김 / KAP(Korea Anabaptist Press)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애초 나 같은 놈이 만들어지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쌍놈의 새끼야, 돈 안 가져 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 신창원의 탈옥 후 고백 중에서

저는 지난해 잔인무도한 여중생 납치 살해 범죄자로 알려진 김길태씨의 중학생 시절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바 있습니다. 급우들과 장난을 치면서 찍은 듯한 그 사진 속의 김길태씨는 해맑게 웃을 줄 아는 선한 눈동자와 환한 입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환히 웃던 '순수한 아이'가 십 여년 뒤 어떻게 이런 극악한 '범죄자 어른'이 되었을까요. 

잔인한 유아 성폭행, 집단적인 청소년 폭력, 친부모 살해 등 극단적인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간 우리는 이러한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오직 강력한 처벌만을 주장해 왔을 뿐, 정작 어떻게 하면 피해자들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가해자들의 재범률을 떨어뜨릴 수 있는지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생략해 왔습니다. 즉 우리 사회가 대부분의 범죄를 다루는 방식은 당사자를 배제하고 격리하여 진정한 '회복'의 기회를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범죄자 중심성과 징역 및 벌금이라는 형벌제도의 한계에 얽매여, 사건은 있으나 피해자는 잊혀지고 범죄자는 책임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은 위와 같은 범죄와 형벌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출발합니다. 서구사회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형사 사법의 대안으로 자리잡은 이 프로그램은 “범죄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손상의 회복을 목적으로 함께 모여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문 조정자(Mediator)가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직접적인 대화를 주선하고 촉진해, 가해자로 하여금 진정한 반성과 손상회복을 위한 방법을 스스로 강구하도록 하고, 피해자로 하여금 사건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금전적 피해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당사자 및 관련 공동체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고, 궁극적으로는 범죄의 악순환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회복적 정의 철학에 동의하여 현재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라는 NGO에서 회복적 사법의 관점으로 평화적 분쟁해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법원의 화해권고위원으로서, 주로 청소년들의 범죄 및 학내 분쟁 사건을 회복적 방식으로 조정하는 전문 Mediator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이 일에서 지향하는 바는 범죄에 대한 일방적이고 응보적인 사법처리를 넘어, 당사자와 그들의 공동체가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손상되었던 상처와 관계의 회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는, 다양한 갈등이 중첩되고 확대 누적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정작 그 갈등을 적절히 다루고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극히 부족하다는 문제의식과 그에 관한 소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학교 현장에 주목하는데, 학교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로서 일반 사회와 유사한 갈등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배움과 신뢰,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특수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교에는 이러한 특성에 걸맞은 분쟁해결수단이 있어야 하고 그를 통해 학교 공동체 고유의 가치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그런 장치가 없다보니 많은 경우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수단으로 일반 사회와 다를 바 없는 사법 절차가 '차선으로' 혹은 '차악으로' 선택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소송 과정에서 대개 갈등은 더욱 증폭되며 결국 '학교'나 '교육'의 가치와는 상반되는 결과가 초래되어 해당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거나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폭력 등 학교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고와 분쟁이 사실 특수한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변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란 점에서, 저는 이런 사례들을 회복적 관점으로 다루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상적 평화를 위해 중요하고 현재의 갈등 해결만이 아니라 미래의 범죄율과 사회적 갈등비용을 낮추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단기적 성과가 나기 힘든 일이어서 활동하는 사람들로서는 숨을 길게 가지고 가야하는데, 한편으론 그만큼 장기적인 비전과 사회적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일례로 저는 청소년 범죄를 둘러싼 조정현장에서 특히 가해 학생이, 본인의 행동이 얼마나 상대학생 및 그 가족, 나아가 커뮤니티에 큰 손상을 입혔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진심어린' 사과로써 '용서'를 받는 때에, 적절한 분쟁해결의 기회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감동과 확신을 느낍니다. 이처럼 범죄자, 특히 촉범 소년의 범죄를 우리사회가 좀 더 회복적인 방법으로 다루게 된다면, 이들이 진정한 반성과 화해의 기회를 갖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김길태씨와 같은 극단적 범죄가 사실은 청소년 시기의 작은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과정은 결코 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비용을 줄이고 안전을 담보하는 일일 것입니다.

국내 아직 회복적 정의에 관한 연구와 사례,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환경에서, 그 철학과 모델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담겨있는 이 책이 나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모쪼록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내면의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고, 나아가 지금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을지 모를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우리 이웃으로 품어, 함께 '손상의 회복'을 돕고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발휘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거시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졌던 평화가, 사실은 소박한 일상과 주변으로부터 확산되는 것임을 경험하는, 작은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고 전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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