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 이론신서 55
심광현 지음 / 문화과학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복잡해보이는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단순화시키면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유비쿼터스 혁명, GNR 혁명 등으로 인해 '혁명적'으로 변하게 될 미래의 상반된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과학적 유토피아의 시대, 혹은 과학적 디스토피아의 시대. 여기서 과학적 디스토피아를 떠올리는 건 쉽다. 소설을 통해서는 조지 오웰의 <1984>, 혹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영화를 통해서는 <블레이드 러너> 혹은 <브이 포 벤데타>를 떠올리면 된다. 이는 현재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 권력의 결합양상을 보고 있으면 실질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암울한 미래를 대신해 과학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이러한 과학적 유토피아로 이르는 대응방식은, '통섭'이다.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 통섭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느낌이 있다면, 그건 무언가를 ‘합친다’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합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은 꽤 많이 있다. 통합은 어떻고, 융합은 어떤가. 그렇다면 종합은? 합일은? 저자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서 진행 중에 있다가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의 반대로 인해 좌초되고 말았던 <U-AT 통섭교육사업>의 ‘통섭’ 역시 무언가를 ‘합치는’ 것 같은 의미일까? 그렇다면 왜 통섭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왠지 ‘통섭’ 그러면 좀 간지 있어 보여서? 그런데 이런 단어들을 굳이 피곤하게 구분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적어도 수학의 공식처럼 ‘개념’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하는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을 창의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이러한 개념에 대한 분리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만약 틀린 개념을 사용해서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면, 이건 마치 수학에서 곱하기를 써야하는 공식을 더하기로 계산해버려서 완전히 틀린 결과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란 거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작업들이 불필요하고 ‘실용적’이지 않게 느껴지게 되면서, 사회는 단순해지며 무식해진다. 지금 현재의 정권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한예종에서 일어난 '감사 사태' 역시 이러한 ‘단순무식’의 무대뽀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실례 아니던가. 통섭이라는 개념에 대한 몰이해 혹은 단순히 특정 인사를 몰아내려는 목적으로 통섭사업에 말도 안되는 억지 이유를 붙여 ‘문제있는 국가예산 낭비사업’으로 낙인찍으며 도구적으로 악용해버리는 사실왜곡이자 언어도단적 비열함.  

 비록 이 책 속에는 저자가 추진했던 통섭교육사업이 부당한 이유들로 인해 중단되었고 이에 대한 부당함에 대한 저자 자신의 논리적 반박도 들어가 있지만,  이 책은 그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다양한 대응방식들의 심도 있는 고민들이 들어간 책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두 문화’는 바로 과학기술과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을 지칭한다. 두 문화로 불리울 정도로 서로 교류도 없이 멀어져있는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왜 필요한가? 이 책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흥미가 넘치는 치열한 논의의 전쟁터이다.  

 우선 '통섭'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란이 소개된다. 현재 ‘통섭’이라는 화두는 실로 유령처럼 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통섭’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유행하게 된 시점은 이화여대의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의 책 <통섭>을 번역해서 출간했을 때일 것이다. 윌슨과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통섭은 쉽게 설명하자면 환원주의적 통섭, 즉 생물학 같은 학문으로 모든 학문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이스트의 정재승 교수는 일련의 통섭 관련 심포지움에서 윌슨의 통섭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DNA를 분석했는데 그 DNA 안에 인간의 심리나 성격,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다 나와있다면 결국 DNA를 이해한다는 것은 심리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되고, 결국 심리학이나 사회과학은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다는 거다. 결국 생물학은 모든 인간의 활동이나 심리,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 된다.” 극단적인 비유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환원주의적인 의미 때문에 윌슨의 ‘통섭’ 개념는 큰 비판을 받았다. 

 이에 저자는 “비환원주의적 통섭”, “수평적 통섭”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원래 통섭할 때의 통, 즉 ‘統(합칠 통)’이 아니라 ‘通 (통할 통)’을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Consilience의 어원 자체가 19세기 윌리엄 휴얼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든 개념이며 윌슨은 이를 재인용한 것일 뿐이고, 휴얼이 말했던 통섭은 그 어원상 "Jumping Together"란 뜻이 담겨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하나로 합쳐버리는 윌슨의 환원주의적 통섭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같이 손을 잡고 도약하자는 ‘수평적, 비환워주의적 통섭’. 결국 저자가 강조하는 통섭은 일방적, 환원주의적으로 ‘합치는’ 것이 아닌, 서로가 가진 차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로 합치는 통섭은 불가능하다. 저자가 진행했던 한예종의 통섭교육사업을 예로 들자면, 한예종 내의 6개원+협동과정, 즉 영상/연극/무용/음악/미술/전통예술+협동과정, 이들을 어떻게 하나로 합치는가? 이들 사이의 분명한 차이와 깊이들을 인정해야 한다. 이들을 단순히 믹서기에 넣어서 갈아버리면서 뭔가 하나의 질퍽한 결과물을 도출하는 방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들의 차이들을 가로지르며, 서로 손을 잡고 ‘점핑 투게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전공의 차이를 인정하며 그 깊이도 존중하면서, 다른 전공들과의 교류와 만남을 통해 창의성을 발휘해 전혀 새로운 ‘그 무언가’에 대한 예술을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T자형 예술인을 키운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저자는 ‘통섭’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전망을 논의 대상으로 올린다. 현재 시대의 기술의 발전의 속도는 눈부시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권력이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 유비쿼터스 사회라고 하는, 즉 어느 곳에서나 컴퓨터가 편재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이 멀지 않았는데, 만약 권력기관이 그러한 컴퓨터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려 한다면? 그게 바로 ‘과학적 디스토피아’이다. 너무 공상과학영화를 많이 본 것 같다고? 현재 정권의 인터넷 통제 및 여론몰이의 양상을 보면 이러한 우려가 단순히 공상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이건 단순한 우려가 아닌,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좀 편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벤야민이 말했듯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민주화의 기회는 점점 더 많아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실례로,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책이 출판되고 신문이 발행되며 문맹자의 수가 적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읽지 못했던 소설을 읽게 되지 않았는가? 따라서 기술발전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전에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 즉 과학기술의 발전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쪽 면은 완전히 통제된 사회의 과학적 디스토피아이고, 한쪽 면은 우리가 허황된 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토피아적 가치를 지향하는 면인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힘은, 창조성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창조성을 길러내는 것 자체가 ‘통섭’적인 생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창조성이 튀어나오는 순간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정한 틀, 굴레에서 벗어날 때이다. 그 경계를 인식하고 끊임없이 경계점에 대해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하며 괴로워하다 어느 순간에 번쩍이면서 그 경계가 무너지게 되는 바로 그 섬광과도 같은 순간. 통섭은 바로 이러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과정이고, 그러는 사이에 길러지는 창조성을 목표로 하게 된다. 즉 통섭을 왜 하느냐라고 물어봤을 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창조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는 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섭에 대한 논의와 필요성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통섭’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일회성의 유행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통섭’한다는 것은 이미 시대적 흐름이다. 과학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응책, 이러한 대응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창조력의 증진이 이러한 흐름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통섭적인 생각을 요구하고 있다. 창의성을 요구하는 모든 분야는 바로 통섭적인 생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통섭적인 생각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자에게 손을 내밀며, 소통하며 같이 점프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손을 잡고 같이 점프할 것인가? 아니면 애써 손을 무시하며 자기중심주의적인 우물 속에 갇혀 있을 것인가? 이 책을 통해 거시적 관점에에서는 멀지 않은 미래의 '과학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응책을, 미시적 관점에서는 개개인의 창조력의 증진을 위한 '통섭적'인 경계 허물기의 원리 등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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