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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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롤리타Lolita] 작업의 광풍을 벗어나 나보코프가 휴식을 취하며 쓴 [프닌Pnin]의 첫 시작은 매우 평화롭다. 소련에서 미국으로 힘겹게 이민와 시골 대학에서 러시아어 강사로 살고 있는 프닌. 오래 전 부인과는 이혼하고 남의 집 2층에 독거. 영어가 유창하지 않고 완전무결 민머리에 고답한 패션을 가진 50대 교수. 

소설의 첫 시퀀스는 우리의 프닌이 근교에 강연을 하러 기차를 탔는데 알고보니 반대 방향의 기차를 탄 것을 독자에게 알리며 시작한다.

불쌍한 프닌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강연할 생각에 들떠 있기만 하다. 작가는 소설의 전반에 걸쳐 주인공이 겪을 난관을 독자에게 ‘먼저’ 귀띔해준다. 


이러한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전지적 작가인 화자가 주인공에게 닥칠 고난을 신나게 이야기하며 독자는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주인공을 골탕먹이는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트콤이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웃음을 담당했던 순재나 세경이 생각난다. 나는 밥상머리에서 그들의 엉뚱한 고난을 보며 웃곤 했다. 

시트콤은 20분짜리 희극으로 웃고 넘기면 될 뿐이지만 프닌은 수십 년에 걸친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다. 


책의 중턱에서 화자는 이혼한 전부인이 갑작스레 프닌의 집으로 찾아왔던 상황을 들려준다. 프닌은 혹시나 전부인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소박한 기대를 한다. 전부인은 돌아오긴 커녕, 아들에게 매 달 돈을 보내 달라는 이야길하고 떠난다. 

남아있는 우울한 프닌을 식탁 반대편에 두고 집주인은 잡지를 보며 우스꽝스런 유머를 던진다. 프닌은 눈물이 터져버린다.

그리고 화자는 기어코, 프닌이 전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 보냈던 열렬한 사랑의 편지까지 독자에게 공개해 버린다. 그리고 그 부인도 사실 보잘 것 없으며 삼류 서정시나 쓰던 평범한 여인이었다는 사실까지도.

한 사람의 내밀한 프라이버시까지 천박한 웃음으로 보내려 하는 화자의 선넘음에 독자는 이상한 역겨움을 느낀다. 


성경의 욥기에서 사탄의 내기에 동참한 하나님이 욥을 고난의 소용돌이로 보내버릴 때를 생각한다. 선한 욥이 무너지기를 기원하며 신나게 고통을 주는 사탄의 시선과 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하나님의 시선이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인지.


나는 책을 읽을 땐 프닌의 고난을 안주삼아 화자와 함께 시시덕대다가 책을 덮으니 기묘한 죄책감이 몰려와 프닌은 변호하는 편에 서게 됐다. 

화자는 프닌에 대해 들은 몇몇 이야기를 고작 짜깁기해 책을 쓰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책을 읽던 나는 그대로 남아있다. 내 부도덕한 인생이 남아버렸다.

희극은 뒷맛이 쓰다. 희극은 20분을 넘겨서는 안 된다. 무책임한 화자을 곱씹으며 프닌을 변호하는 나를 쳐다본다. 우리의 프닌. 


(이 서평은 문학과지성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프닌#문학과지성사#블라디미르나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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