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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 전2권
백선경 지음 / 징검다리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1월입니다.
매서운 바람이 잔뜩 부는 계절인데도, 나는 가끔씩 날짜를 잊을때가 있습니다. 그건 내가 바깥 공기를 잘 쐬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넌즈시 짐작해보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내방 어디에도 그 흔한 달력 한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종일 따듯한 내 방 책상에는 나처럼 계절을 잃은, 행운목 한녀석이 행복하게 비틀거립니다. 정말, 남 추울 이겨울에 제일 따듯한 보금자리를 찾아온 저 아가는, 이름처럼 행운하나는 제대로 타고났습니다. 철을 모르고 작게 자라난 가느다란 새 뿌리에, 나는 새삼 날짜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생일선물로 행운목을 받아온후로,
내가 달력을 떼어낸 그 날이 바로 9월이니까..
그러니까 벌써 다섯달이 지난겁니다.
1월.
오늘같은 1월의 어느 날.
또 1월이 지난 어떤 좋은 봄날에는,
까마득히 알 수 없는 아득한 언덕에서,
하얗고 맑은 조팝꽃 향기가 흐드러지게 가득할까요?.
아무에게도, 또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많은, 또는 수많은 당신들처럼, 역시 사랑에 목이 말라가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결심하기는, 이렇게 바보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생기면은 기필코 내 모든 생명까지 주어야겠다고, 아무도 말해준일이 없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여자가 보았던 그 사랑이, 하얀 꽃잎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나무아래서, 슬프고 맑은 하모니카를 연주해 내던 소년.
해맑게, 하얀 이를 드러내고 그렇게 웃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선한 눈매에 다정한 목소리가, 수줍게 떨면서 나를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때는 온통 사방에도, 하얗게 하얗게 조팝꽃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
이 바보같은 여자 미현의 어떤 마음 한조각은, 투욱 떨어져 나가고 만겁니다.
그날 잃어버렸던 빨간 운동화 한짝처럼, 그 여자의 마음도 그에게로 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남자가 가슴에 웅크러쥐며 그리워하던,
그 빨간 운동화 한짝과 꼭 같이 말입니다.
아주 오랜시간이 흐른후 거의 그를 포기할 무렵.
거짓말처럼 그를 다시 알게되고, 그의 이름이 태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어떤 우아하고 하얀 여자를 향해,
‘가희야’하고 다정하게 부르고 굉장히 맑게 웃어줍니다.
그 웃음이 도통 미현을 붙잡아 놓고, 도무지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날의 그 향기로웠던 언덕에서 해맑게 웃던 그 웃음.
.....미현이 태현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무작정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소망했습니다.
나는 이 책이 실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대로 이 글이 실화라면, 그녀는 정말로 행복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행복해져도 좋을만큼 순수한 사람이라는것엔, 내 한그루 행운목을 몽땅 걸어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라서, 그들의 사랑을 미화할 힘이 없습니다.
내 창밖의 그 차갑고 시린 겨울바람처럼,
현실에서는 추운 날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법 아닙니까..
겨울을 견디지 못할바에는,
나처럼 아예 통체로 달력을 버렸다면 좋았을것을..
그들에게는 달력을 버릴 배짱과, 혹여는 잃어버릴 재치도 없었습니다.
사랑.
그 눈부시게 투명하던 꽃잎들은, 겨울이 되자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갑니다.
그러면 모든 꽃이 날아간 나무는, 그 마르고 갈라진 몸을 처량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터지고 갈라진 암갈색 나무가 미현입니다.
꽃향기가 가득한 그 언덕에서 똑같이 시작되었던 그들의 사랑.
봄날에 같이 시작되었던 그 눈부신 만남에서,
미현은 나무처럼 사랑했고, 태현은 꽃잎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들 중의 한명은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전혀 되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겨울의,
그 혹독하고 잔인한 시련속에,
미현은 나무처럼 자신을 벌거벗기고 혼자 섭니다.
그렇게 가만가만 견디고 숨을 죽이면, 분명히 봄날은 또 올 것 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현이 모르는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미현을 위해 울던, 그남자 태현의 사랑이었습니다.
꽃잎같이 사랑했던 그는, 살짝 날아서 도망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에게는 겨울을 견딜 마음도 힘도 없습니다.
그에게 겨울은 지겹도록 추운, 마침내 꽃잎이 떨어지고 마는 죽음이니까요.
대신에 그는 눈물만큼은, 마음껏 미현을 위해 흘려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미현이 눈물을 전혀 믿지 못할때까지,
그는 미현을 위해 울었습니다.
1월....
차차 꽃이 떨어지고, 또 점차 모든 나무는 숨을 죽이는 계절입니다.
나는 훈훈한 방안의 책상에 앉아서, 달력이 없어서 계절을 잃은 내 방을 보았습니다.
도망간 1월 대신 따듯해진 창가.
내 작은 행운목은 영문도 모르고 봄날묘목처럼만 신이 났습니다.
이 애는 내가 저를 키우기 위해서, 계절을 ?아낸 걸 모를겁니다.
오직 창가쪽만을 향해 틀어놓은 작은 기름 난로는,
발갛게 얼굴을 붉히고는 행운목만 바라다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이런겁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배려해주는것.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결국에는, 그 어느것 하나도 그를 위해서는 아까울게 없는것.
나도 모르게 혼자 훌쩍이는 날이 있어도, 알수없이 항상 행복해지는 것.
그러니까 미현이 눈물을 믿지 못하는것에 있어서, 나는 슬픈 마음을 가눌길이 없습니다.
눈에서 흐른다고 모두 눈물이 아니라는것을,
아직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지 못했으니까..
사철을 틀어놓아 가난한 자취생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작은 난로가,
오늘도 여김없이 훈훈하게 추운 창가를 데워놓습니다.
나는 아마도 죽는날까지 행운목을 키울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을 하게되면,
미현처럼 나무와도 같은,
게다가 이왕이면 행운목을 닮은 그런 사랑을 하고싶단 말입니다.
‘사랑..’
어떻습니까.
당신이 어떤 사랑을 하시던 간에 그 사랑의 형태를 알고싶다면,
글쎄..?
미현에게 한번쯤 찾아가서 그녀를 위해 울어보는것도 좋은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