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기낙경 지음 / 오브제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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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 기낙경 저 / 오브제 출판

나에게 작은 위로를 건낸다







요즘, 날씨가 지나치게 춥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그래서 어느정도는 추워져야 되려 사람 손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서도, 미처 준비되지 않은 맹 추위에 마음까지 얼어붙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고보니 연말이 다 되었다. 매년 이 맘 때 즈음이면, 나의 올 한 해를 무가치한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연말병'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게다가 이번 연말병은 '서른'이라는 꼬리표까지 달고있어 평소보다 더 많은 부질없는 반성들과 후회를 동반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독종이다, 아주.

 

이십 대, 그리고 싱글라이프의 마지막을 고하는 겨울을 보내는 요즘. 한 권의 책이 내 시선을 끈다.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이라는 뭔가 묘한 느낌의 책. 작가인 기낙경씨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서른'이라는 단어와 '의자'라는 사물이주는 묘한 동질감과 매력에 나도 모르게 한 두 페이지씩 그녀의 생각을 따라가보게 된다.

 

'의자'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를 따라 서른 즈음의 작가가 겪었던 생각들을 매력적인 문체로 써내려간 책. 때로는 과거의 연인과의 이야기로, 때로는 친구들과의 대화로, 때로는 읽고 본 책과 영화 등으로 나름의 서른을 정의하는 그녀. 책을 보는 내내 의자, 자리라는 것은 단순한 사물 혹은 누군가의 소유물, 그리고 생활흔적 정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위치와 마음의 씀씀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한 사람의 '흔적'과 '도량'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간은 사람의 흔적이 깃들어야 특유의 시간과 냄새가 베여든다'는 저자의 말 역시 내게도 예외는 아니니까 말이다.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을 서른이라는 시간동안의 나. 그리고 내가 머무르며 앉아있는 지금의 이 의자에는 얼마만큼의 어떤 종류의 흔적들이 베여있는 것일까?

 

쉼 없이, 때론 힘들게, 때론 신나게 달려왔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또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이전 잠시 의자에 앉아 생각해보는 시간 '서른'. 이처럼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삶의 스펙트럼을 동반한 '나'라는 존재를 포괄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자연스레 내 생각들도 만남과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 주제를 바꾸어 나간다. 지금도 내 주변에 남아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들이야 말로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에. 사람을 잃는 것을 거의 공포처럼 생각하는 내게, 사실 한 해의 반성과 후회의 대상 모두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 혹은 '그 결과로 내게 돌아오는 것' 인 것을 감안하면 나의 '서른'이 이러한 '사람'과 '관계'로 귀결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행운아다. 철 없던 이십 대의 정신없던 순간들을 오롯히 기억해줄 동반자가 옆에 있으니 말이다. 나는 지인들과 후배들이게 우스겟소리로 짧고 많은 횟수의 연애를 추천하곤 하지만, 사실 내가 피 끓는 이십 대 동안 가장 잘한 일이라면 긴 시간동안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사랑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난 10년의 연애동안 그녀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했던 순수한 감정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만큼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다. 사랑하면 연인이 마치 거울처럼 느껴진다고 하는 것처럼, 오랜 기간의 연애를 통해서 그녀와 나 모두가 보다 성숙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축복은 이제 앞으로의 시간도 함께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가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같은 시절과 시간을 함께 겪고 느끼는 것 이상의 위로와 공감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한 작가가 서른 즈음에 느꼈던 감정들이, 단순히 비슷한 시절에 느낀 생각들이라는 점 때문에 나에게 그럴싸한 위로한 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나만의 의자를 따뜻하게 데워둘 생각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혼자가 아닌 함께 앉을 수 있는 보다 아늑한 의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앞으로의 내 삶들, 그리고 '우리'로서 함께 걸어나갈 나의 서른을 스스로 응원해본다.





[쾌속 시간 열차]

 초침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아침의 의식비단 나만의 아침 풍경은 아닐 것이다사실 이십 대까지만 해도 이렇듯 시간의 무게에 눌려 있다는 느낌은 적었다돌아보면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하지만 서른을 넘기고 나니 지난날이 아깝고 다가올 날이 두렵다는 의식이 지배적이다세월이 무서워지니 점차 시간의 위력을 실감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오직 평화로운 시간만 센다'라고 시간의 단위를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p.18

 

[젊은 사람의 깜냥]

 그림자가 어두우니 내 얼굴과 마음도 시꺼멓게 탔다고 우겼다우기다 보니 그게 나였고 내가 그 증거였다. - p.29 

 현실이라는 칼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의외로 밀도 있는 '자기 알기'를 체험해야 한다. - p.30

 

[여배우들]

 누구나 제 나이듦을 감지하는 때가 있는데 나 역시 서른을 넘기며 자연스레 생기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직감하고 산다. (중략비슷한 동년배들과의 대화 주제도 대부분이 그 '예전같지 않음'에 대한 말들이다하지만 철없던 십대나 어떤 의미에서 실수를 연발하고 살았던 이십대가 그립지 않다다만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흔한 말로 섹시한 눈빛이며 포즈 취하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책도 많이 읽고 공부에 맛들이며 내적 성장을 위한 시간을 먼저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나는 외려 멋있게 나이든 사람 얼굴에 삶의 무게가 깃든 사람들에게 더 끌리는 편이다. - p.47 

 사실 젊은 날 거짓을 배운 사람과 정직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얼굴은 나이가 들면 들통나게 마련이다누군가는 자꾸 무엇을 채우고 덧대었지만 허위가 보이고 누구는 자꾸 버리는 것이 습관이 돼 빈약한 듯하지만 진정의 뼈대만은 튼튼하다나는 그런''를 탐하는 것이다. - p.49

 

[도시의 잠언]

 지난 시간이 무색해지고 첫 마음의 열기나 청신함은 얼마쯤 색이 바랬다내가 앞으로 넘어야 할 걸어야 할 길보다는 거기 있다는 성공이니 성취감이니 하는 말보다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들이 먼저 보인다. (중략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갖게 된 여러 지능적인 태도들이 그렇다스스로 치이고 주저앉다 보니 생기게 된 계산적인 마음들이 아쉽다노하우라는 것들이 되려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 p.59 

 마음이 바쁘고 그걸 돌볼 시간조차 없는 날들그런 날의 연속일 때는 뒷산에라도 올라가보자가서 30분만이라도 푸른 것들에 눈을 돌려보자사람관계에서 오는 독은 사람으로 풀면 안 된다자연으로 풀어야 한다. - p.59 

 결국 안의 상처는 바깥을 응시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시간 속에서 아문다안과 밖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의 깊이는 바깥에 대한 사유가 얼마나 풍성하냐에 따라 좌우된다. - p.61

 

[영웅들]

 어떤 이와는 순간을 어떤 이와는 생활을 어떤 이와는 여행을 함께하고 싶다감성을 자극하고 기분 좋은 긴장을 심어주고 느긋한 평화를 지겨워하지 않는 이들이라 믿고 싶고, 또 그렇게 욕망한다기꺼이 나의 영웅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 p.87

 

[눈물의 근육]

 사람들 사이에서 연인 앞에서 사회 속에서 나 역시 기억을 위장해 숱한 고백을 했고조언을 뱉어냈다. (중략깊은 기억들.함부로 꺼내보지 않는 기억일수록 그 멍울은 온전하지 않다어디 한 군데 해지지 않는 곳이 없다새로 기워 덧댄 흔적도 없지 않다시간이 스며들고 오해나 거짓이 끼어든다사탕발림도 숨어 있다기억이 멍울 속에 박혀 있기에 그 추억은 적잖이 상처 입은 몰골이다하지만 찰나의 이미지 속에 빠지지 않고 깃든 것은 바로 빛그러이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언젠가 그 빛을 더듬어 찾아내야 하는 이유도 바로 빛 때문이다. - p.92

 

[침묵]

 어린 시절이야 멋모르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곤 했지만 '말 없음'을 지극히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라고 배워온 나이에 이르러서는 '침묵'이란 그야말로 작정하고 뱉어내고 실행에 옮기는 단어인 것이다. - p.137 

 말이 나를 상하게 하고 말이 어떤 진심을 훼손시킬 때아니 이런 부지불식간의 멍들을 느끼지도 못한 채 일상은 흘러가고 관계는 방치된다그 의식하지 못한 멍들이 진해질 즈음아마 그때쯤 나는 혼자 하는 식사를혼자 떠나는 여행을바로 침묵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39

 

[의자의 향기]

 비록 서럽도록 외롭고 쓸쓸하다 하더라도 그 의자가 지난 멋은 쉽사리 흉내내지 못한다떠도는 것을 멈추고 정주한 의자는 함부로 끌어내지 못한다다만 슬며시 앉아볼 뿐다만 슬며시 바라볼 뿐은은한 의자 향을 맡아볼 뿐이다무릇 시간의 옹이가 박힌 것들은 저마다 차향이 난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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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움 보다 따뜻함이 더 오랫기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른이라는 시기는 이제 뜨거움보다는 따뜻한 삶을 지향하게 되는 전환점이 아닐까요.

여러분의 덧글과 공감은 제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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