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까닭을 묻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만난 하나님
김기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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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또, 욥?
우리는 한때 욥기를 묵상하며 욥이 당한 ‘까닭 없는 고통’ 때문에 함께 슬퍼했고, 한 가문의 이유 없는 몰락과 그것을 지켜보는 친구들의 손가락질, 배우자의 절규를 읽으며 욥의 억울함에 덩달아 서러워하고 같이 울부짖기도 했다. 또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홍성사,2002.를 붙들고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 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고통의 문제』138. 나 “하나님께 자아를 완전히 양도하는 행위에는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고통의 문제』150. 와 같은 문장에 밑줄 그으며 고통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홍길동전』이나 『박씨전』과 같은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영웅들에게는 인생의 찬란한 순간에 어김없이 ‘시련’이 찾아오고, 조력자의 도움 등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진정한 영웅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영웅의 일대기처럼 우리가 영웅은 아니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의 삶에 고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고통을 통과하게 되면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삶으로 쓰디쓴 고통을 받아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고통’, ‘평등한 고통’ 앞에 초월한 듯이 태연할 수 없었다. 두렵고 괴로운 시간을 견디며 하나님께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 일이었나, ‘하나님께 자아를 완전히 양도하는 행위’가 너무 가혹하지 않나, 나의 고통이 어째서 하나님의 선이 된다는 말인가를 반문하며, 이런 생각 또한 불손하고 무례한 생각이라 자책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고통도 함께 주신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심으셨던 하나님과 함께 매우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이다.(아담과 하와가 아니었더라도 그들의 후손 중 누군가는 선악과를 따먹었을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선택을 하시는 걸까? 얄궂지만 이건 인간의 영역 밖의 문제라 생각하며 이 세상 하직한 후 천국에 가서 물어볼 것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또 욥일까? 왜 또 고통일까? 고통에 대해서 아직도 할 이야기가 더 있을까. 특히나 저자는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 있는 사람,2008.를 통해 이미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한 바가 있지 않나. 저자는 왜 이렇게까지 고통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통을 묵상하는 걸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충실한 독자로서 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 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욥, 딜레마에 빠진 개혁자
인간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해야 한다. 그 가운데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평생 행복을 누리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면 좋겠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은 그저 고통받는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13) 저자는 죽고 싶을 만큼, 죽이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통과했으며, 욥이 자신이고, 자신이 욥이고, 우리는 모두 욥임을 고백하며 서두를 뗀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한 자다.(욥기1:8) 그것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둘도 없는 부자요 독실한 신자인 데다 가족도 화목하다.(16) 게다가 건강하기까지 하다. 딱 좋은 순간이다. 인생의 찬란한 순간에 고통이 찾아온다. 느닷없이, 정말 황당하게도, 욥에게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총체적’ 재앙이 ‘연속적’으로 ‘긴급’하게 휘몰아친다.(45) 재물을 잃고, 자식들을 잃고, 건강도 잃는다. 이건 우리의 인생과도 닮았다. 좀 살만하다 싶을 때 고통은 스윽 머리를 드민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 앞에 극렬하게 저항했다. 저자는 욥을 루터와 같은 개혁자로 표현한다.(115)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은 신명기 역사관(75)에 근거하여 욥을 정죄한다.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시각으로 욥을 바라보고 있다.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므로 욥의 고난은 정당한 것이라며 서슴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욥은 자신이 이런 총체적 고통을 겪을 만큼의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신명기 역사관,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전통에 반기를 든다. 욥은 하나님 앞에 분노하고, 울부짖으며, 계속해서 거침없이 질문하고 저항한다.

그렇다면 욥은 어찌 이렇게 불손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빌닷은 욥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 앞에서, 본인은 의롭고 하나님은 불의하다는 말을 마음대로 지껄인단 말이냐’(107)는 생각을 내비친다. 빌닷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같아서 소름 끼친다. 그러나 욥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생떼를 쓰듯 하나님 앞에 참을 길 없는 고통을 토해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 하고 싶어도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 나온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속이 터질 것 같아 욥은 외친다. 허나, 그 소리는 함성이라기보다는 신음에 가깝다.(85)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가 그 이유이다. 하나님의 본심을 꼬치꼬치 캐묻다가는 하나님이 미워질 것 같아서 두려웠던 얄팍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은 분명 나를 납득시킬 만한 분이시라는 두터운 신뢰다. 구원을 향한 갈망, 하나님의 해결을 바라는 소망이 고통의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91)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곳, 울부짖음이 없는 곳, 고통이 없는 곳이 이 땅에 도래하기 전까지 우리는 상실과 슬픔으로 울어야 한다. 눈물을 참을 수는 있어도 눈물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온당하지 못하다.『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 있는 사람, 개정판,2016,66-67.

그러나 여전히 욥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정녕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리 행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로움을 다시 규명하고 규정할 것인가?(119)

욥기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욥기를 묵상하며, 딜레마에 빠진 욥을 바라보며, 모두 함께 딜레마에 빠진다. 욥기를 읽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 사회에서 의로운 자들이 불행을 겪고, 나쁜 놈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딜레마는 더 깊어진다.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책을 읽어가던 중 우리가 지나치게 고통의 이유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로운신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걸까? 심지어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다. ‘징악(懲惡)’의 주체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의 의인인 욥이라니, 의인이라면 보통의 인간과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의인에게까지 고통을 주시는 걸까.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집중하고, 질문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고통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을 뿐, 여전히 권선징악의 신명기적 역사관에만 함몰된 채 하나님께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제멋대로 하나님을 권선징악의 프레임에 가두고 있었다. 하나님은 수동적인 분이 아니다. 한 가지 공식만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고통은 모두 그들이 지은 죄 때문만은 아니다. ‘무고한 자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 건가요?’라는 질문은 어쩌면 ‘하나님 인간을 왜 창조하셨나요?’ ‘하나님 인간은 왜 먹어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과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권선징악, 인과응보와 관련이 없는 고통도 존재한다는 것을 욥을 통해 알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무고한 고통을 당한 이는 욥뿐만이 아니다. “무고한 자의 고난이 없다면 예수도 없다!”(142)라고 저자는 힘주어 이야기한다. ‘죄와 벌’이라는 신학 언어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고난 자체가 원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그것이 고난을 묻는 자에게 주어진 대답이다.『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 있는 사람, 개정판,2016,30.

욥의 마음으로 같이 까닭을 묻다가 보니, 욥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것이다. 고통의 이유를 찾고자 애썼던 시선이 성경 속 욥기의 존재 이유로 옮겨졌다. 무고한 자의 고통도 하나님의 역사 속에 포함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욥은 우리 모두의 고난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대리적 고난을 겪는 하나님의 사람이다.(17) 욥에게 맞는 신학은 무고한 자가 당하는 고난을 설명하는 신학이다.(142)

의로운 자의 고난이 주는 안도감
성경에 욥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욥기의 목적은 우리를 고통의 딜레마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자의 고통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 욥의 고통을 통해서 말이다. 욥할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신명기의 하나님만 존재했더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쓰럽고 불쌍하기 그지없다. 고통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을까 스스로를 탓하고 자책하며 고통보다 더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갔을 것이다. 눈앞의 고통보다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벌 받고 있다는 사실에 더 괴로울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자를 벌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신다. 하지만 이제 우린 욥기를 통해 무고한 자의 고통도 알게 되었다. 욥 같은 의인도 고난을 받고, 심지어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는데, 나의 고난이야 말해 뭣하랴. 삶이란 고통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고통은 그냥 있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성장의 첫걸음이다.(269) 나도 욥이고, 당신도 욥이다. 욥만큼의 의인은 아니지만 우리도 때론 무고한 고통에 직면할 것이다. 이제 우린 고통을 통과하면서 고통에 자책과 죄책감까지 더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의롭고 무고한 욥의 고난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자신의 고통에만 주목하던 욥이 24장에서는 고난 받는 이웃을 본다. 집과 가축을 빼앗기는 사람들, 빚을 갚지 못해 팔리는 사람들, 가난하기에 자신의 천부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악착같이 일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돈 없고 백 없어서 아무도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208)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보인다면, 바로 그때가 고통의 연대기가 끝나는 시점이라고 했다.(208)

나와 당신, 사회의 선량한 욥들이 고통을 무사히 통과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와 같이 절벽 끝에 서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208) 내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연대할 때(209) 고통의 끝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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