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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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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논술에 연결시키면 안됩니다
사르트르 전공자의 번역이 아니예요 그리고
소설 주제가 수험생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워요
그 이유는 다음 블로그를 참고하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https://m.blog.naver.com/niz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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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짱 2021-06-08 2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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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짱 2022-01-02 2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자가 모르고 잘못 번역한 부분을 1년전 출판사에 지적했는데 아직도 그대로!
 
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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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으로 소설의 주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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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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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의 느낌을 갖게 한 건 삶 속에서의 사건과 이야기 속의 사건을 같은 걸로 착각한 때문이고   두 사건이 같은 사건이라도 이야기 속 사건은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마치 악보의 음표들처럼) 다음 사건을 예고하는데 삶의 사건 그야말로 뒤죽박죽 우연적이고 다음 사건의 예고가 없다 다만 인간의 분석과 짐작을 순서와 예고로 착각하는 것!
그래서 이 소설은 로캉탱이 모험은 삶에 없고 책속에나 있는 것이라고 뒤늦게 깨닫는 과정이다  (아 참 우리는 평소 모험을 특별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건이라 생각하는데 그것과 다르다고 로캉탱이 소설 초반에 설명하죠)
그러므로 모험은 책속에나 있고 삶에는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로캉탱 자신이 그동안 소설 속에나 있는 정밀한 시간성을 삶에서도 실현하려고 한 헛된 노력이었음을 알게 하죠  젊은 날 정밀한 시간에 대한 열망은 결국 삶과 존재가 부조리(조리한 책 속 사건처럼 정밀하지 않다)라는 진상을 보지 못하게 한거죠


구토는 위와 같은 진실이 숨어있다가 불현듯 로캉탱의 자아에 엄습하는 '진실'의 전조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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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zan 2021-04-0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s://m.blog.naver.com/nizan

참고하세요

nizan 2021-04-22 22:0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고전작품을 작가별 장르별로 구분해 정통적인 판본을 최고 전문가의 주해와 함께 발간하는 프랑스 문학전집이 있습니다 바로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야드 총서입니다

사르트르는 1937년 <구토>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1년 여를 검토담당자의 수정요구에 응해야 했죠 아직 데뷔도 하지 못한 신출내기에 불과했으므로 거부 없이 이 과정을 감내했는데요 심지어 그가 원고에 적은 제목은 <멜랑콜리아>였지만 사장 갈리마르씨의 요구대로 제목도 <구토>로 바꿔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겉표지를 감싼 ‘띠지‘에 <앙투완 로캉탱의 비일상적 모험>이라는 부제는 수용되었고요

사르트르가 이 정도로 ‘모험‘이라는 테마를 중요시 했지만 이 개념은 설명하기 다소 복잡하므로 이는 다음 편에 다루기로 합니다 지금부터는 ‘진실 같음‘vraisemblable이라는 테마를 언급하기로 하는데요

바로 이 총서에서 발간한 <사르트르의 산문집>에 <구토>와 그 주해서가 포함되어 있는데요 1730쪽에 다음과 같은 해설이 각주로 소개됩니다



˝ 사르트르는 <구토>의 기본주제들 중 하나로 ‘진실 같음‘에 대한 공격을 꼽았다 당시 그는 ‘진실 같음‘을 부르주아적 사유의 한 카테고리로 보았으며 실제나 진실을 대할 때 부르주아들은 그 자체를 신경쓰기 보다는 ‘그들 생각에 가능한 것‘이라는 베일을 통해 이들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진실 같음‘은 이같이 이념적이고 실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직접의식‘과는 대립한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이 ‘직접의식‘이야말로 바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고 ‘혼자 사는 인간‘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직접의식‘은 무엇을 통하거나 무엇에 매개되지 않고immediate 마치 어린아이의 직관처럼 이념이나 여론에 물들지 않은 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로캉탱이 바로 ‘혼자 사는 인간‘으로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겁니다

그 다음 ‘진실 같음‘은 국내에 ‘진실다움‘ ‘여실성‘ ‘ 핍진성‘ 등의 다른 번역어들이 있지만 제 생각에 이들보다는 원래 의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를 가장 먼저 고안해낸 분은 <시학>의 저자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랍니다 <시학>에서 ‘진실 같음‘은 ‘진실‘과 대립되는데요 문학의 소재를 다룰 때 그 소재가 되는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 즉 ‘진실‘이라도 상상을 벗어날 정도로 특수하다면 독자의 반응을 생각하여 각색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생각해보면 작가라면 거의 다 부딪히는 문제 아니겠어요? 그래서 작가는 상상력을 통해 변조된 내용을 취급하지 않나요? 그러므로 ‘진실 같음‘은 문학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합니다

니짱 2021-04-1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제 2개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재구성해보겠습니다

# 우선 이 소설에는 <멜랑콜리아>가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출판사에 제출했던 원제이기도 합니다. 우수나 우울이 되겠네요 무슨 뜻의 우울이냐면 주인공이 헤어진 애인도 그랬듯이 일상의 너절함과 우연성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마치 소설이나 연극의 주인공들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보이는 문학과 예술의 그 엄정하고 정밀한 시간성을 이 두 젊은이도 마치 연금술사처럼 자신들의 일상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가능할까요?


두 주인공은 치열하게 사랑하였고 동시에 그 정밀하게 연결되는 시간성을 실현해보려했지만 진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절망하여 결국 헤어졌지요 그게 6년전이고 그들은 이제서야 그들이 추구했던 시간성은 바로 이야기와 문학과 음악과 같은 비현실(비현존)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게 바로 로캉탱이 그토록 애태우며 그리워한 ‘모험의 느낌‘과 예전 여자친구가 다시 설명하는 ‘완벽한 순간‘인데 모두 일상현실에서 잡을 수도 가닿을 수도 없는 문학과 예술세계의 시간성이죠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와 여전히 우수에 젖어 부빌시내의 카페나 도서관을 헤메며 4년을 보냈고 여자친구도 다시 만나보니 그녀 또한 마치 불 같던 예전의 정열을 잃고 돈많은 이집트 노인네에 얹혀 여행이나 하고있는 중이죠


그들이 헤어짐과 동시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건 다시 강조하자면 문학과 음악과 연극과 같은 예술이 인간에 보란듯이 뽐내는 정밀하고 엄정한 시간성이었죠
말하자면 그들은 일상의 시간을 문학과 연극의 시간으로 헛되이 연출하려 했던 것이죠 삶의 무대 에서 모든 연출이 실패로 끝나자 이들은 그대로 연명의 여생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설 말미에 로캉탱은 작가가 되는 마지막 기회를 살리고자 합니다 작가로서 소설이나 작품을 사람들에게 발표한다면 자신의 창조물 덕분에 사람들이 작가 또한 기억하게 되므로 예술의 비실재(비현존)의 세계에, 또한 그 엄정하고 정밀한 시간성의 세계에 작가 또한 자신의 한쪽 발을 걸쳐놓으며(?) 일말의 구원가능성을 타진해보는거죠


# 다른 한편 ‘구토‘는 출판사 사장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강제한 제목이지만 소재면에서 중요하긴 하죠(물론 ‘모험의 느낌‘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한 마디로 주인공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를 한순간 덮치고 잠시 포로처럼 억류하는 일종의 ‘전조‘ 감각이죠 그럼 무엇에 대한 전조?

(그런데 로캉탱의 ‘모험의 느낌‘과 안니의 ‘완벽한 순간‘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공격대상으로 삼았다고 한 부르주아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우습지만 작가 사르트르도 그의 주인공 로캉탱과 안니도 부르주아죠 일종의 자기고발입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의 젊음을 농단한 ‘모험의 느낌‘과 ‘완벽한 순간‘은 그들이 꿈꾸던 세계에서나 가능한 엄정하고 정밀한 시간성이라 이미 말씀 드렸죠
이는 또한 19세기말 프랑스 사회의 주류가 된 부르주아 들의 공통된 열망이자 이미 공고해진 착각이기도 하죠 )


이런 착각의 지층을 깨고 가끔씩 주인공에게 ‘관념‘의 형상으로 나타나다가 소설초반 조약돌 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본격화하는 ‘구토‘ 증상은 그 착각과 <진실 같음> (남자 답게~ 남자 같이~ 어른 답게~ 어른 같이~ 등의 표현에 숨어있는 일반여론과 공통관념의 통칭이며 여론을 주도하는 부르주아들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규약이 된다) 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진실‘의 전조 이죠


그럼 작가가 말하려는 ‘진실‘은?

1) 존재의 실체(실존 혹은 현존), 2) 혹은 존재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부조리 그 자체(18세기 이래 학문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부르주아계급의 시각대로 이성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설명되거나 분류될 수 없는 상위개념)

이게 로캉탱 이야기의 진상이고 <구토>가 전달하려는 ‘진실‘입니다 ‘구토‘는 바로 이 진실이 부르주아의 이런 두꺼운 허위의식(진실 같음)을 헤집고 안개처럼 스며나오게 하며 로캉탱에게 이 모두가 그동안 자신의 허위의식이었다는 깨달음을 주는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 마지막으로 구토증상으로부터 그를 구출해주는 재즈와 같은 음악과 스탕달 소설과 같은 문학이 있습니다 불쾌감을 동반하는 구토를 진정시켜주는 건 바로 위에 언급한 ‘모험의 강한 느낌‘이고 회상을 통한 이야기가 주는 ‘엄정한 질서의 느낌‘입니다 가히 구토증세의 치료법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항상 훈훈한 기운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로캉탱이 찾아 그곳으로 도피하려했던 ‘비실재의 세계‘를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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