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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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알라딘 대전시청역점에서 『기형도 전집』을 살까말까 하는 고민을 한참동안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시집이었기 때문에 선뜻 구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 시집을 구입한다는 것은 조카한테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조카에게 선물한다 하여도 읽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글을 읽는 독자라면 헌책방에서 기형도 시집을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구입하세요. 그리하여 이 시집이 실내장식으로 구입한 골동품처럼 轉落(전락)하여 먼지를 뒤집어 쓰는 일이있어도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꿈꾸는 작가지망생이라면 기형도 시는 반드시 필독해야만 하는 작가에 속합니다.

 

독자 여러분 한 편의 ()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제 입장을 솔직히 밝힌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한 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한다는 것 그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 한 편의 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하려면......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직관 혹은 미시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직관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거대한 숲을 관찰하면서 개개의 나무를 통찰할 수 있어야하고, 개개의 나무를 관찰하면서 거대한 숲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을 때, 한 편의 시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필자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감상할 기형도 시를 읽으실 때, 이 점을 항상 有念(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엄마 걱정

 

위의 시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 기형도 시로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 걱정기억할 만한 지나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하려면, 독자 여러분은 空間(공간)이라고 하는 개념부터 정립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드는 이들 중에서 기형도 시인의 독특한 文體(문체)로서 해는 시든 지 오래라고 하는 詩語(시어)妙味(묘미)만을 강조하며 설명하는 ()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기형도 시를 誤讀(오독)하게 만드는 주범에 속합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은 기형도 시인의 개성 강한 문체가 반영하고 있는 시대에 대한의 공간 인식을 정립하지 않고, 시어의 묘미만을 분석하고 평하는 작가의 글과 동영상유튜브 강연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 중에 교양상식이 낮은 독자의 눈과 귀를 항상 어둡게 하고 지적 성장을 제자리에서 맴돌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기형도 시인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등단하여 19893월에 요절하기까지 개성이 강한 작품을 4년 동안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기형도 시인의 독특한 문체가 상징하고 있는 시어의 묘미를 명확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에서 짐짝이 무엇을 지시하고 의미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영혼은/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었다에서 검은 페이지가 상징하고 있는 대상과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필자인 나와 독자 여러분은 기형도 시인의 독특한 문체가 내뿜고 있는 시어의 묘미만을 감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엄마 걱정에서 강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화자는 어두운 밤에 홀로 방안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숙제를 아무리 천천히 해도 엄마가 오시지 앉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은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가 안 오시네라고 하는 부분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숙제를 해보아서 알겠지만 숙제란 항상 버겁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 숙제를 천천히 완급조절하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화자는 분명,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바라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가 아닌 영특한 아이일 것입니다. 그런 화자는 자신을 빈방찬밥처럼 담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면? 화자는 허기진 배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된밥이나 진밥이 아닌 찬밥으로 자기자신을 비유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화자는 방안에 있다는 것은 빈방이 아닌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빈방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이와 같은 질문을 숱하게 던져도 명확한 답을 유추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 그는 스물 아홉이라는 짧은 을 살다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곁을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형도 시인은 아주 어린시절을 빼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의식하고 파악하면서 살다간 십대와 이십대는 아마도 1970~80년대가 될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군부독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억압하던 시기였습니다. , 이승만 독재정권을 막을 내리게 한 419혁명의 가치를 516쿠데타로 유린한 박정희정권과 518광주민주화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625전쟁 이후 민중들을 파리 목숨처럼 죽여 막대한 유혈을 흘리게 했던 전두환정권이 통치하던 암울하고 우울한 시대였습니다.

 

여러분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철학자로 알려진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自我(자아)非自我(비자아)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라고 정의합니다. , 집은 주체의 자아가 최초로 보호되는 공간으로서 건전한 인격이 형성될 수 있는 장소를 뜻합니다. 그로 인해 자아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경우 불안전한 인격이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집입니다. 그런 과 같은 장소로서 기형도가 살아간 1970~80년대 또한 같은 공간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군사정권에 의해 훼손되고 억압받았던 1970~80년대의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는 기형도의 부정적인 시어의 문체를 통해 이러한 점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면서 엄마 걱정을 다시 읽어보면 해는 시든 지 오래라고 하는 시어에 내포된 상징적 의미를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 ‘는 밝음과 따뜻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 시들었다는 것을 필자 나름대로 유추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화사한 봄을 알리는 노란 유채꽃이 활짝 핀 상태에는 하얀 눈이 전달하는 차가움보다는 따스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정원에 활짝 핀 빨간 장미는 노란 유채꽃에서 전달되는 따스함보단 거친 운동을 하고 있는 남성의 육체에서 전달되는 여름 한낮에 내리쬐는 해의 무더운 기운과 같은 온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형도 시인은 엄마 걱정에서 해가 시든 지 오래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노란 유채꽃과 장미꽃이 활짝 핀 상태가 아니라 쭈굴쭈굴하게 시든 꽃잎처럼 해가 시든 지 오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 상태로서 어두운 밤에 자기자신은 빈방에 놓인 찬밥처럼 집에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금간 창 틈에서 고요히 내리는 빗소리마져 무섭다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집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정의했듯 화자 자신을 보호해 줄 공간입니다. 그런데 화자 자신을 보호해줄 엄마가 부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집은 우리가 알고 있듯 안전한 공간이 아닌 불안전환 공간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화자는 무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침내 혼자 엎드려 훌쩍거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화자는 21행에서 아주 먼 옛날이라고 언급하면서 현재 자신은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성장했음을 내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3행에서는 내 유년의 윗목이라고 말하면서 이 시는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윗목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해먹던 가난했던 시절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주 먼 옛날이라고 2연을 시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자가 처한 현재의 상황은 아랫목처럼 따뜻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곳이 아니라 윗목처럼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상황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어린시절이나 어른이 된 현재의 상황이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여러분 중에 기름보일러 세대는 나무로 밥을 해먹던 시대의 아랫목윗목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蛇足(사족)과 같은 설명을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보통 나무로 밥을 해먹던 옛날 가옥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 따뜻한 기운이 불지핀 아랫목에서 시작하여 윗목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밥이란 불을 강하게 피우지 않기 때문에 가마솥에 많은 양의 물을 데우는 곳이 농경사회에서는 육체노동을 하시던 아버지 아니면 몸이 불편하신 노인의 자리로 비워둡니다. 그래서 혈기왕성한 어린아이는 방안의 중간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윗목은 나무를 피운 열기가 거의 전달되지 않는 공간에 속합니다. 그래서 옛날 家屋(가옥)인 윗목은 항상 차가운 기운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추운 겨울에는 아랫목에 옹기종기모여 잠을 자게 됩니다. 아니면 최대한 따뜻한 기운이 맴도는 아랫목으로 최대한 몸을 누이게 됩니다. 이렇듯 기형도 시에서 윗목이 상징하는 것은 차가운 기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으로써 인간이 회피하게 되는 장소를 뜻합니다. , 어린시절이나 어른이 된 현재의 상황이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형도 시 중에서 엄마 걱정보다 더 좋은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선호하며 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소재 그 자체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위험한 家系1969년에서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라는 부분으로 확인할 수 있듯 기형도는 반장으로 뽑힐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비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않을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형도 시를 접한 독자들은 엄마 걱정을 평할 때 다른 작품에 비해 공감을 더욱더 잘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여러분 왜 예술이라고 하는 종합 장르 중에서 글로 이루어진 문학에 속하는 책을 어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읽으라고 하는 잔소리를 할까요?

 

이 점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나요! 저는 이 점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대체 文學學文大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최근 필자인 저는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철학을 어느 때보다도 더욱 재미있게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에 아직 대학생이 아닌 분들은 저처럼 공부를 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보통 어려운 철학서적의 용어를 접할 때, 철학백과사전을 이용하세요. 그래서 개념의 뜻을 어렴풋이 익히고 철학자의 저술을 구해서 읽으세요. 아니면 칸트를 평생 연구한 철학자가 칸트의 철학을 아주 쉽게 설명한 저서를 먼저 접하거나 아니면 칸트를 뛰어넘어 그의 개념을 비판하는 철학자의 책을 끝까지 인내하며 읽으세요. 그리하면 칸트의 저서를 읽을 때 개념 정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 이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은 기본상식입니다. 어차피 오늘날 같이 다양한 전문인으로 분류되어진 사회에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는 시대는 사라졌습니다. , 전문가들이 서로서로 융합하여 같은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가 到來(도래)하였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의식하게 되겠지만 서양哲學史(철학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또렷이 남긴 철학자는 항상 전 세대의 학문을 뛰어넘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반대로 기원전에 하나의 사상을 정립한 노자, 공자, 순자, 장자, 맹자, 주자 등의 저술을 지금까지도 공부합니다. ,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현재의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을 이해하고 평하려면 당대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인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철학을 의무적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문학하는 작가를 엘리트(élite)로 이해할까요. 어른들은 우리를 왜 엘리트로 키우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변화되는 시대인식을 작가들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키우는 것은 바로 책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쉽게 접하고 익힐 수 있는 대상 중에 하나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여 성공한 어른들일수록 공통점으로 자신의 집에 서민이 갖출 수 없는 서재를 갖고 있으면서, 우리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추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읽고 이해하면 자신이 베푼 사랑과 탁월한 안목을 뒤늦게나마 깨우치고 고마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보통의 어른들 또한 이 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자신들은 실천하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공부하라? 책 좀 읽어라? 잔소리하는 부모님을 너무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설이 너무 길었나요. 여기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왜 기형도 시인의 좋은 작품이 아닌 엄마 걱정을 평하는 이유를 이해하시려면 딴짓과도 같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동양철학을 하시는 유명한 분께서 공부는 問學(문학)이라고 말씀하시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분명, 동양철학은 스승과 제자가 묻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좋은 지적입니다. 막말로 내가 매우고 싶은 대상을 전공한 자에게 물어서 배우는 것이 제일 빠르고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공부하시는 것을 직업으로 하실 분들에게는 좋은 지적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공부는 文學(문학) 그대로 글로 배우고, 글로 남겨 가르치는 것을 學文(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글로 배우고, 글로 남기면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이 배운 것을 시지푸스처럼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그리고 봄으로 永劫回歸(영겁회귀)하듯 반복하는 것이 바로 大學(대학)인 것으로써 큰배움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 시지푸스가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올리면 제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는 변증법의 인식이 바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양철학은 이것을 반복했는데 동양철학은 이것을 뛰어넘는 삶의 지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문학을 공부하는 전공자들이 서양철학을 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가 동양의 사상보다는 서양의 사상을 우위에 놓고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맞이하게 되는 문화는 서양철학의 사상이 아닌 동양철학의 사상이 우위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四季節(사계절)이 항상 영겁회귀하는 것은 뒤로 후퇴한적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와 같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이고, 이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는 것이 저는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못난 어른들은 가르치는 은 없고,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르고 받드는 것이 유교의 라고 정의합니다. 아니 우리의 뇌를 그렇게 洗腦(세뇌)시키고 있는 꼰대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가르칠 때 변화하는 당대의 시대인식을 담아내고 있는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저능아인 꼰대의 어른일수록 가난이라고 하는 감성을 자극하는 시를 평하고 자주 언급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은 이 점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써, 좋은 작품을 알아볼 수 없는 작가지망생의 교양상식의 수준을 항상 제자리에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시인 것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기형도 시 중에서 엄마 걱정을 평하는 글과 강연을 피하라고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문화나 변화하는 시대인식을 언급하지 않는 작품을 평하는 글이나 강연을 기피하시기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배우고 자주 접하면서 익혀야할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당대의 문화와 변화하는 시대인식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기형도 시인은 그런 시를 남기지 않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니 그런 시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은 있으나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유고작은 이와 같은 점을 반영하고 있는 몇몇 작품이 젊은 작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반영하는 시를 분석하기 전에 1980년대의 암울하고 우울했던 그 시대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대학 시절부터 필자는 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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