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의 일기
양우조 외 / 혜윰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지만 곧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저 바깥세상을 향해 나가야 할지라도 망설임은 없다. 언젠가 내 아이가 바깥세상에 나갈 것을 생각하면서 그애가 보고 나갈 빛을 달아두려 한다."(113쪽)


내가 무한히 좋아하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러브 스토리.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중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한 양우조. 그리고 잠깐 서울에서 그를 본 기억을 품은 채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그와 재회한 신여성 최선화. 그들은 김구 선생의 주례로 결혼을 하고, 중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딸 제시를 키운다.

이 책은 공습이 끊이지 않던 허허벌판 중국 땅에서 제시를 키우며 부부가 같이 쓴 육아일기다.

아버지는 딸에게 늘 안락한 보금자리를 주지는 못했다. 대신 싸웠다.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고 끝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어쩌면 이들이 아이를 키운 게 아니고 제시가 팍팍하던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무한한 따뜻함과 가르침을 준 걸지도 모르겠다. 채워진 것보다 채워질 것이 더 많은 아이, 무한한 호기심, 넘어져도 한번 울고 나면 그뿐, 끝없이 다시 걸음마와 뜀박질에 도전하는 아이의 무심한 회복력과 생명력. 


그런데 사실 우리도 모두 그런 아이에서 출발했다. 

잊었을 뿐, 잊은 척했을 뿐. 


아기도 사람의 표정에 섬세하게 반응한다. 어른이 된 우리의 마음도 사실은 이렇게 민감한데 그것을 숨기고 사는 게 아닌가? 세상을 살면서 감정에 무뎌지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되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안 좋은 태도를 가지고 말하면 무뎌진 마음 사이로 자신도 모르는 상처가 쌓일 것이다. 아기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을 순수한 사람이라고 마치 특별한 사람처럼 말하곤 하지만, 사실은 아기 때의 반응이 인간 본연의 느낌이요, 반응일 것이다. 아기 때의 모습을 감추고 감추어 더욱 높고 두꺼운 담을 쌓는 것이다. 아기들의 그 즉각적인 반응에서 사람들 얼굴 속에 숨겨진 모습을 찾게 된다. _36

이 시간, 이 땅에서 아버지가 아기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가정이란 보금자리에서 따뜻한 관심과 가슴으로 그저 아이를 지켜주는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선택을 물려주며 어쩔 수 없으니 감수하라고 할 것인가?
아이가 훗날 이국을 떠돌면서 생활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는 짧은 한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것으로 독립성취라는 간절한 우리의 소원을 담아낼 수 있을까? _60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한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채워주어야 할까!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태어난 지 일곱 달 된 아기가 갖고 있는 그 빈자리가 놀랍고 조심스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 더 크고 넓은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심어주고 싶다. 부모인 내가 갖지 못한 것이 그곳에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저 부모된 이의 욕심일까? _61

약 일주일 동안 콧살을 찌푸리며 웃던 버릇은 이제 그만두고, 오늘부터는 입을 크게 벌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는 새 버릇이 생겼다. 누구를 보고 따라하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하루하루 달라져가고 있는 작은 몸짓과 표정, 신체의 변화와 감정의 표현들, 제시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변화들을 하나하나 기록해가면서 느꼈던 엄마 아빠의 대견함을 알 수 있을까? 몸짓과 옹알거림. 그 하나하나의 의미가 우리에겐 얼마나 신기하고 소중했던지. (...)
제시가 언젠가 인생의 좌절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 제시가 지녔던 소중한 의미를 기억해냈으면 좋겠따.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제시가 이 일기를 발견했을 때, 나는 제시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부모된 이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 느낄 수 있기 바란다. 그리고 그 기쁨을 계속 전하는 사람이 되어가기 바란다. 제시의 작은 몸짓과 표정이 우리에게 주었떤 그 의미만큼 제시 자신의 행동과 표정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무한한 의미를 깨닫기 바란다. _88

달음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넘어져서 다치기가 예사다. 넘어지고 울다가, 다시 뛰고 노래하고, 넘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뛰놀기를 시작한다. 지치지도 않는다. 넘어지는 걸 겁내하지도 않고, 넘어졌다고 낙심하지도 않는다. 한번 울고 나면 그뿐이다. 그리고 다시 걷고 뛴다. 지금 우리 동포들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면서 제시는 튼튼한 다리와 건강한 몸과 맘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도 잘 놀고 있다. _100

이 해를 보내었다. 영영 보내었다. 다시 만나지 못할 곳으로 멀리멀리 아주 보내고 만 것이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뜨고 있는 사이에 제시는 고이고이 자라며 많은 아양과 재미를 세상에 떨쳐놓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요즘도 새 옷을 입었다고, 고운 옷을 입었다고 좋아라며 노래를 하노라고 때때로 높고 낮은 목소리를 내어보고 있다. 그 소리가 마음 심란한 주위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있다. _101

내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에겐 가장 마음 따뜻한 시간이다. 흐리고 폭풍 부는 일기라고 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따사로운 공기가 감도는 아늑한 방안에서 보내는 훈훈한 시간이다. 하지만 곧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저 바깥세상을 향해 나가야 할지라도 망설임은 없다. 언젠가 내 아이가 바깥세상에 나갈 것을 생각하면서 그애가 보고 나갈 빛을 달아두려 한다. 아이가 저 세상에 나갔을 때, 집 안에서 느꼈던 따사로운 불빛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바람 부는 날이라도, 폭풍우가 치는 날이라도 한 아이의 아버지에겐 새로운 기운이 솟는 것이다. _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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