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피로사회 + 투명사회 - 전2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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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 타지 않을까. 정말. 더 효율적으로. 스스로 다 타서 없어지는 우리. 노동자.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 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 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103쪽).”

그래, 위험하다. 매우.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점을 동반하기에. 그게 능력인 줄 알았고, 그게 높이 평가받는 줄 알았다.

당신은 그렇지 않았는가. 오로지 높이 평가됐는가. 다른 걱정이나 고민이 없었고 불안하지도 않았는가. 일말(一抹)도? 단 한순간도?

아니, 그랬을 리 없다. 우린 모두 심약했다. 매월 급여에 목매달았다. 풀칠할 목구멍 때문에. 때론 욕심 사납게. 자기 착취 행위에 빠져 그저 한낱 자본가일 뿐인 자를 ‘윗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자(者)를 한번 손윗사람으로 본 뒤로는 성낼 줄 모를 지경에 이르게 마련. 그자! 자본가는 그저 계약 상대자일 뿐. 우리! 노동자보다 지위나 신분이 높은 자가 결코 아니다. 그자가 마치 손윗사람인 듯 행동하면 성내야 마땅하다. 헌데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 간(50쪽)”단다. 심약해서일까.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데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50쪽)”니 이거 큰일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데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50쪽)”지 않는가. 우리, 노동자. 잘못된 것 바꿀 만한 성냄을 잊은 채 짜증과 신경질만으로 자멸해야 할까.

성내지 않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질병이란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48쪽)”이라는 게 지은이의 통찰. 이를 두고 니체는 ‘사색적 삶의 부활’을 표명했단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아렌트는 활동성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48쪽)”는 것.

환상…, 허공에 흩어질 헛된 생각. 하여 우리, 노동자는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긍정성의 폭력(21쪽)’에 유린당하고는 했나 보다. 그 가공할 폭력을 가슴에 품은 나머지(내재성) 괴롭고 아픈 것조차 알지 못했나 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중략……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게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21쪽).” 우리, 노동자는 그렇게 기운이 다 빠져 없어지고(탈진), 결국 다 타서 없어질(소진) 지경이다.

온몸 소진하는 ‘성과주의 망령(亡靈)’에서 벗어나자.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 근대적 노동 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27쪽)”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66쪽)”되고 “성과 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66쪽)”이기도 하다.

피로(疲勞). 과로로 정신과 몸이 지쳐 힘들거나 그런 상태. 우리, 노동자 어깨를 함부로 마구 누르는 그것. ‘물리’적으로는 고체 재료에 틈과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파괴되는 현상이다. 마침내 파괴된다지 않는가. 정신 차리자. 바싹.

‘성과 주체’인 당신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81쪽).” “성과 주체와 전쟁을 벌이는 제2의 자아(Alter Ego)”로 해석할 수 있는 ‘간을 먹는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와 당신의 간(肝)을 계속 파먹는단다(82쪽). “자기 착취의 관계”란다. 하여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하고, 자기 착취 주체인 프로메테우스와 당신은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82쪽)”이란다.

다시 소진(燒盡). 그래. 다 타서 없어질 것 같다. 우리, 노동자. “소진(Burnout)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 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 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 간다(94~95쪽).”

마모(磨耗). 역시. 다 닳아서 없어질 것 같다. 우리, 노동자. “우울증에 자주 선행해 나타나는 소진(Burnout)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다(98쪽).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99쪽).” 그렇게 나, 우리, 노동자는 유린됐다. 당했다. 지금, 짓밟힌다.

 

덧붙여 하나. 이 책. 웅변한다. 철학자가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까닭을.

 

둘. 망종(亡種). 소진하고 탈진하는 성과 사회의 노동자와 이를 강제하는 자본가의 틈새를 파고드는 아주 몹쓸 종자. 성과 사회 노동자의 피로를 가중하는 아주 몹쓸 종자. 그자 역시 스스로 소진해 탈진하고 말 것이되 연명할 기간을 얼마간 늘리고자 자본가와 야합해 노동자를 짓밟는 데 앞장섰다. 그자가 망종인 까닭이다. 자고이래로 이런 종자가 더욱 악랄하고는 했다. 자신을 지배하는 자에게 귀염을 떨어야 했으니까. 그래야 목숨을 겨우 이어 얼마간 더 그따위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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