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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편집자로 오래 일하다가 작가로 데뷔한 첫 작품이라 한다. 나이트 3교대를 서는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가 리언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저녁에서 아침시간 동안 쉐어하자고 내놓았고, 살인적인 런던 물가에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티피는 이 계약을 승낙한다. 설정이 지나치게 연애지향적인 소설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실은 이 책을 선택한 건 데이트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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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등의 개념을 통칭해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acquaintance rape)이라는 용어가 발명된 지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오랜기간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소설 <밀크맨> 에서도 폭력적인 행위, 그리고 폭력이라고 이름지어지지 않은 행위들에 대한 고발이 이루어졌다. 무척 먼 옛날 인것 같지만 그 밀크맨이 보여주는 시대에서 우리는 얼만큼 왔을까. <밀크맨>이 그 이름 붙이지 못하는 폭력을 치밀하게 문학적으로 고발한다면, 이 셰어하우스 작품은 흥미 진진한 드라마나 영화 같은 방식으로 좀더 친근하게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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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많고 티피에게 잘해주고 사랑을 듬뿍 주는 저스틴. 티피는 무언가 이상해도 자기가 기억을 못하는 탓이고, 자기가 덤벙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더이상의 생각 회로를 꺼버린다. 티피는 저스틴에게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 소설은 다름아닌 ‘가스라이팅’을 다룬다. 저스틴이니까 만나주는 거지, 난 매력이 없어’ ‘나는 그가 없으면 길도 찾지 못해’ ‘분명 난 옷을 버린 적이 없는데 내가 버렸다고 하네. 그가 내 기억력이 형편없다고 하던데 그래서 인가봐.’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다. 이제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이 조금 유명해졌지만, 이런 식의 언어 표현이 폭력이라는 개념도 희박했다. 저스틴은 티피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에 티피가 가치없는 사람임을, 부족하고 기억도 잘 못하는,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없는, 연약한 존재로 가두려 한다. 그는 그렇게 오랜시간 천천히 티피를 무너뜨리려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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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 위로 방식이다. 티피가 스스로 그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결심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구들. 티피는 ‘내 잘못이 아니야. 저스틴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나를 흔들려는 거야. 나는 그 없이 혼자서 행복할 수 있어.’ 라는 마음의 소리가 분명해질 때까지. 오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단순히 셰어하우스라는 공간, 특수한 상황에서 사랑이 어떤식으로 기발하게 싹틀 수 있는 지에만 매달려있지 않다. 티피가 자기 마음의 힘을 키워내고, 저스틴이 자신에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닌 폭력이었음을 깨닫는 그 오랜 과정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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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특히나 티피와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위로할 언어가 극히 빈곤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혹은 나를 많이 좋아해줬던 그 사람이 왜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남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대신 추천하고 싶다. 아픔 속에서 일어서고, 단단해지는 과정은 단 한 번의 경청과, 단 한 번의 조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만번의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그리고 오백페이지 가량 공들여 여자들이 겪어왔을 문제를 끌어올려 설명하는 소설. 나는 이런 목소리가 세상에 더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