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 시인선 315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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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은 일인칭 자아의 신비와 권위를 지워버리는 자리에서, 다시 어떤 다른 '사랑'을 발음한다. 주체의 정념의 자리를 소거한 채로 '나'는 그 첨예한 개별성만으로 겨우 존재한다. 이장욱의 '나'와 '그'는 주체의 인격적 권위와 실체성을 비워버린다는 의미에서, 탈인칭적이거나 비인칭적이다. (...) 그래서 이장욱의 사랑은 '나'의 인격적 지위를 주창하지 않는 다른 '나'의 존재 방식이다."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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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의미의 서정시에서 사랑은 나라는 주체가 너라는 대상을 나의 의미 체계 안으로 포섭하여 동일화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세계의 자아화 또는 자아의 세계화라는 구조 안에서, 이러한 일인칭적 자아의 사랑은 언제나 그 대상을 동일성의 폭력에 노출시킨다. 타인의 모든 언술과 행위는 나라는 주체로 인해 곡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와 '나'의 소통, 그리고 사랑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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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와 단절되고 싶어 / 네가 그리워'라고 말한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 너와 단절되고 싶다고 한다. 내가 나로서 너와 연결되었을 때, 나는 완벽한 의미에서의 '너'와 마주하지 못한다. 너는 나의 주체성으로 인해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너와의 단절을 꿈꾼다. 나의 그리움 속에서, '너'라는 존재는 완벽하게 모호한 타자성이 되며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너는 여전히 나의 주체적 정념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장욱은 일인칭적 자아에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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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이장욱의 '나'는 끊임없이 이탈하고 실종되고 지워지고 흩어지며 증발한다. '나'의 주체성이 지워졌으므로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난 존재가 된다. '나'의 존재방식은 이제 오로지 '나'의 외부에 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탈인칭적' 자아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뒤틀린 시공간의 진공을 부유하는 비닐봉지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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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개인적인 관계로 가득하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나의 유일한 외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에게 이송되는 형태로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일인칭적 자아였던 나는 이제 탈인칭적 자아로서 타인에게 거주하는 임시적 존재가 된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너와 나는 계속 서로의 인칭을 바꾸며 지속된다. 이것이 탈인칭적 사랑의 모습이다. 확실한 것은 '나'가 아니라 타인 혹은 타인과의 관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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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은 타자의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의 폭력에서 멀어진다. '나'는 없고 오로지 '너'에게 머무르는 '나'만을 간신히 획득할 수 있는 존재방식은 너를 너로서 존재하게 한다. 내가 '나'를 통해 너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너를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현대적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더 이상 '코기토'라는 뒤주 안에 타자와 세계를 가두어 놓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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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일 테지만, 특히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재확인한다. 나는 그림자가 있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는 '나'의 간접적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오가 되면 우리의 그림자는 가장 짧아진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근대적 세계의 종말을 알렸을 때,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정오에 있었다. 니체를 기점으로 포스트모던의 세계가 열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정오는 그림자를 통해 알 수 있는 확실한 나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시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이 죽은 자리를 대신하여 해가 없이도 거할 수 있는 완전한 주체가 되었지만, 이제는 신이 죽은 자리 자체를 지울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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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죽고 근대적 자아가 신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필요없다. 이 세계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유아론적 환상에서 벗어나, '너'라는 무한한 타자성을 통해서만 나도 이 세상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탈인칭적 사랑이며, 이 사회에 만연한 '과잉-주체'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 널 사랑해". 투명한 비닐봉지 같은 내가 세상에 대고 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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