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운명게임 1~2 세트 - 전2권
박상우 지음 / 해냄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본문보다 먼저 만나는 게 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ㅡ샤카무니」

샤카족의 성자라는 의미에서 샤카무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줄여서 샤카, 그 외에도 세존, 석존, 불, 여래 등 열 가지 존칭으로 불리는데 모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를 칭한다고 하며
본명으로는 싯다르타 고타마, 내가 알기로는 석가모니라고 불리는 이의 짧고 강렬한 가르침.

박상우 소설가가 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은, 소설의 첫 문단을 보여주기도 전에 위의 세 문장을 먼저 보여준다. 다음 장은 소설의 차례, 차례를 넘어가야 소설의 진짜 본문이 나타난다. 이보리라는 등장인물과 함께 기이한 새벽 풍경이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책을 읽은 다음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같다. 첫 세 문장, 게임은 이미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어쩐지 샤카무니의 세 문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0# 이라는 보이지 않는 문자가 나타날 것 같다.

 

 


*

 

 

「운명게임」은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편과 #1편 형식으로 소설과 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소설 속 등장인물 이보리는 『인간 문제의 궁극에 대한 답』 이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이 책에 흥미를 느낀 '어르신'이 이보리에게 전담 상담을 요청한다. 이보리는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샤카무니를 샤카무니로 부르는 이유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덮어씌워진 종교적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원음 그대로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가 출간한 책의 부제목이 '샤카무니를 찾아서'인 것도, 인간 문제의 궁극에 대한 답으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로 연결되는 바로보기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설명한다.

 

 

차원을 넘나드는 이들의 인생 문답을 보노라면, 이것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헷갈리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각주가 학술저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책의 뒷면에 작가의 말에서 발췌해놓은 그대로, 저자는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넝마주이처럼 지구상에 널려 있거나 은닉돼 있거나 파묻혀 있거나 덮여 있거나 밀봉돼 있던 갖가지 것들을 수집하고 채집하고 발굴하>여 온 듯 했다.

 

 

이보리가 책을 완성하여 출간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가 나타나면서 소설 속 긴장감이 새롭게 형성되는데, 한편 소설 속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는데, 쓰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방해받는 수준으로, 어머니의 병환과 함께 소설가는 삶과 죽음, 영과 혼에 대한 각성을 이루어간다.

 


*

 

 

 

이보리가 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소설가가 소설을 완성하는 데에도 비슷한 작용이 일어나는데,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것을 '진실'로 증명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진실'이라고?" 하던 것이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이런 거대담론을 소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심각해졌다. 책 속 내용은 낯선 것들 뿐이었는데 왜인지 모르지만, 이렇게까지 다 까발려야만 했나(그래도 괜찮을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지구에 태어났다 p.51"라는 문장을 되새겨본다. 은닉돼 있거나 파묻혀 있는 어떤 것들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 그들의 수레이자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이 책의 표지디자인도 독특해서 좋았다.

 

유전자 염기서열이 양 끄트머리에 있는 네 개의 은하를 연결하는 것 같은 모양새도 재미있지만, 사람을 뇌와 눈, 코, 입, 다리로 분리해놓고 정작 사람의 모습은 네모 칸 안에 흐릿하게 처리해버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듯한 두 개의 동그라미는 하늘인지 바다인지 파도인지 의문스러운 것들로 채워넣은 것이 책에 담겨있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책의 1,2권이 분홍과 파랑색인 것은 아담과 이브에 대한 힌트가 아니었을지?

책을 읽고나서 표지를 보면 한 부분이 외계인의 형상처럼 보이는 신기한 일도 발생한다.

 

 


*

 

 

 

내가 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던 친구가 갑자기 <운명게임>을 하자고 말했다.


(나) : ?? 뭘 어떻게?

(친구) :  무작위로 책을 펴서 왼쪽 페이지에 쉼표(,)가 몇 개 나오는 지 내기해서 치킨이랑 피자 쏘기!!!! 어때?

(나) : 운명에 맡기자고??

(친구) : 어, 엄청 배고파. 이거 지금 운.명.이야.
 

슬픈 것은 때로 예감할 수 있다고 했던가? 예감하더라도 운명이 운명대로 흐르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ㅡ샤카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