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목소리, 다른 방 트루먼 커포티 선집 1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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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예전에 오에 겐자부로 작가의 <우리들의 시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망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소설인데 저는 재밌게 잘만 읽어서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의 동생이 트루먼 커포티를 닮은 얼굴이라고 묘사되고 있는데요... 저는 그때 인터넷에 작가의 이름을 검색하여 처음으로 사진을 접했었답니다. 당시에도 미남이시네! 생각은 했었습니다만... 트루먼 커포티의 전집 표지들을 감상하고 있자니 새삼 경탄하는 마음이네요. 어딘가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듯 예민한 눈빛이 마음을 잡아끄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풀잎 하프>를 가장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 책은 그것 한 권만 구매하면 택배비가 붙기에...^^;;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이랑 해서 한꺼번에 두 권을 구입하면 되지 않나 생각도 했었습니다만, 트루먼 커포티의 스타일이 저한테 맞을지 어떨지 몰랐기 때문에 제 딴에는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ㅋㅋㅋㅋ 이렇게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을 다 읽고 나니, 그냥 <풀잎 하프>도 구매할 것을 그랬다,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 나중에 언젠가는 <풀잎 하프>도 꼭 사서 읽기는 할 것입니다! ㅎㅎ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유년시절이 많이 떠올라서 그립고 행복했어요. 조엘과 흡사한 환경에 처했었다, 는 것은 아니지만 조엘의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성장과정을 묘사해내는 트루먼의 문체가 향수를 건드렸다고 봐야 옳을까요? 저는 정말 예쁘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만을 좋아했던 여자애였어요! 그래서 <빨간머리 앤>의 앤이 벚꽃나무를 보면서 하얀 신부를 떠올려내는 발상이 황홀했고 <주홍글씨>에서 주인공의 딸 펄이 산호와 장미 같다는 묘사, 열매와 꽃으로 스스로를 장식한 모습이 숲의 요정 같다는 서술에 흥분했으며 <비밀의 화원>의 메리가 장미덩굴이 우거지는 화원을 가꾸는 과정에 가슴 두근거렸지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에게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저는 세라처럼 어른스럽고 다정하고 우아한 성격의 여자애들보다는 성깔있는 말괄량이 왈가닥 여자애들에게 홀딱 반했답니다!- <소공녀>에서 묘사되는 장밋빛 등갓, 두툼한 케이크, 인형의 레이스 장식 등등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빨려들곤 했답니다. ㅋㅋ 이렇게 대학생이 되어서 좀더 많은 작가들의 좀더 많은 작품들을 접하고, 교수님들께 문학은 아파야 한다, 문학은 소외된 자들의 곁길의 산물이다, 문학은 고독과 죽음이다 등속의 잔소리를 듣다 보니(...) 어여쁘고 아기자기한 묘사보다는 처절하고 어둑어둑한 묘사에 보다 잦게 마주치도록 되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도 질척하고 고통스러운 묘사에 가까운 스타일이죠. 지쳐서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는 개 같은 인상의 인간이라든지, 눈물과 눈곱이 배어나는 누런 흰자위라든지, 오물 냄새가 풍기는 목 매단 시체라든지, 그러한 이미지가 훨씬 선명하게 그려지는 글을 쓰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게 최대 포인트지만...ㅎㅎㅎ

그런데 이렇게 오랜만에, “깊어지는 녹색 바다가 특이한 포도주처럼 하늘 위에 퍼졌고, 그늘진 구름이 산들바람에 밀려 이 거대한 녹원 위를 느릿느릿 지났다. (p.40)”라든가 “포도넝쿨처럼 격자무늬로 엮인 별들이 남쪽 하늘을 설탕처럼 덮고 있었다. (p.44)”라든가 “벽에 격자무늬로 어른거리는 무화과 이파리 그림자가 점점 부풀어 올라 해파리의 투명한 살처럼 거대하게 떨리는 형체를 만들었다. (p.80)”라고 하는 묘사들을 읽고 있자니... 숲과 구름과 별과 꽃과 요정, 설탕과 케이크와 보석과 같은 느낌의 단어만 책에서 접해도 들뜨던 어린시절이 퍼뜩 떠올라서 가슴 한 구석이 아득했네요. 장미덤불이라니, 멀구슬나무라니, 라일락과 버찌와 인어 신부와 푸른 계단이라니... 저는 아직도 이런 찬란하고 아름답고 예쁘장한 수채화 같은 묘사들에 쉽게 뒤흔들려 버리는가 봅니다.

<다른 목소리, 다른 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주가 조엘과 지저스 피버 앞에서 엄청나게 씩씩하게(ㅋㅋㅋㅋ)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노래 부르던 장면이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은 랜돌프! 신경쇠약 증상이 의심되었던 에이미 양도 나름대로 맘에 들었어요. ㅋㅋㅋ 랜돌프가 기모노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오던데, <소리와 분노>의 퀜틴 양이 생각나더라고요. ㅋㅋㅋ <소리와 분노>도 참 좋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언제가 됐든 꼭 서평을 쓸 것입니다. 랜돌프는 순정적이면서도 어린아이 같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걱정스럽고,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구석이 있는 인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좀더 자주 랜돌프와 마주치고 싶었는데, 제 욕심만큼 비중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서 아쉬웠어요. 드라우닝 폰드 괴담은 정말 매혹적이지 않나요? 저는 늪과 함몰에도 깊은 관심과 흥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오필리어 같기도 하고... 조엘이 발견한 유령 같은 여자 때문에 전에 읽었던 고딕 소설 <나사의 회전>생각도 났네요. 제 기준 <나사의 회전>은 고딕 소설의 전형이자 교과섭니다. ㅋㅋㅋ 여하튼 사랑을 갈구하는 아름답고 애처롭고 가녀린 소년 조엘의 기이하고 수상하면서도 파스텔 빛깔 그림처럼 부드러운 성장 이야기,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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