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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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유코, 오에 겐자부로, 미시마 유키오와 더불어 좋아하는 일본 작가 중 한 분입니다. 에쿠니 가오리! 참 글을 청순하게 쓰시는 분이죠. 에쿠니 가오리라는 이름 곁으로도 섬세한 물결이 비치는 것 같아요. ;)

에쿠니 가오리 작가님의 글은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처음 접했답니다. 어딘가 푸르스름한 듯, 청아한 문체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자신만의 문체를 구축해낸 작가들은 색과 향이 분명한 소우주를 완연히 품고 있는 것 같아서 부럽더군요. 누군가 저자 이름을 숨긴 채 작품 속 한 두 문장만을 던져준 후, 누구의 작품이냐 물어도 그녀의 이름을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_^

이 책은 수박향기, 후키코 씨, 물의 고리, 바닷가 마을, 남동생, 호랑나비, 소각로, 재미빵, 장미 아치, 하루카, 그림자 총 11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11편 모두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수박향기와 호랑나비와 소각로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씩 차례대로 짧은 감상문을 써 보겠습니다!

우선 수박향기에서는 몸이 붙은 형제 미노루와 히로시가 저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한 설정이었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이었답니다. 순간 오싹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캐릭터와 상황인데 그 마저도 특유의 청량감 넘치는 문체로 산뜻한 분위기로 끌고 가 버리는 에쿠니 가오리는 역시 문학계의 산소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노루와 히로시가 선풍기에 대고 소리를 내는 모습은 별 것 아닌 사소한 장면 이기는 한데 저의 향수를 건드려서 울컥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어릴 때는 누구나 한 번쯤 해 본 경험이 있지 않나요? 이 장면뿐만 아니라 소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여자애들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저의 어릴 때를 떠오르게 하고 아련하게 만들더군요. 모두에게 유년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집이고, 언젠간 꼭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시간대라고 저는 믿고 있답니다.
그리고 미노루는 자꾸만 '나'를 만지고, 히로시는 그런 미노루에게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장면도 인상 깊었습니다. 즉 서로 상반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데, 오히려 이 모습에서 두 사람이 진정 하나의 인격처럼 느껴진 건 왜였을까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미노루와 히로시처럼 본질은 결합 쌍생아 일지 모릅니다.

후키코 씨에서는 후키코 씨가 정말 묘하게 무서웠습니다. 저만의 생각이겠지만, 후키코 씨는 김혜진 작가의 '어비'라는 캐릭터를 닮은 것 같았어요. 악한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초조한 매력이 감도는 캐릭터들이 소설 내에서 종종 흥미롭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물의 고리는 '물의 고리'라는 과자 묘사가 너무 상큼하니 마음에 들었다는 기억이 남네요. 직사각형 노란색 양갱, 투명한 젤리를 얇게 덧입히고 양갱과 젤리 사이 동그랗게 자른 레몬이 끼워져 있다는데... 정말 소설 속 언급 그대로 '아름다운 이름'과 '시원한 모습'입니다. 실제로 팔까요? 인터넷에 검색해봤지만 나오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 물의 고리에서도 싸늘한 장면이 엷게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달팽이들을 밟아 죽인답니다. 어린아이들은 투명해서 무서울 때가 있지요. 저도 어릴 때 숱하게 개미를 뜯어 죽이던 기억이 났답니다. 더듬이나 다리를 뜯으면, 개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을 돌아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흥미가 시들해지면 마침내 발로 짓밟곤 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 한답니다. 아이일 때는 왜 그랬을까... 저도 그때 "주거주거주거"라고 어느 소년이 말해주었더라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개미 죽이기를 그만뒀을까요?

바닷가 마을에서는 빵 공장 아줌마가 주인공이 구슬을 고르라고 할 때, 금붕어를 닮은 구슬을 고르는 장면이 어여뻐서 좋았습니다. 그 짤막한 장면에서 일본 특유의 감성을 엿본 기분이었어요. 일본이 괴괴할 때는 그렇게 기이하고 괴상할 수가 없지만, 감성이 돋보일 때는 정말 잔잔하고 참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본 영화도 꽤 있죠. 그렇듯, 빵 공장 아줌마가 구슬을 골라내는 이미지가 영화처럼 펼쳐지는 느낌이 선명했답니다.

남동생은 아무리 깨끗한 문체와 맑은 이미지라고 해도 소재가 장례였기 때문에 마음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담담한 문체라서 더 슬펐어요... 저는 분명 외동입니다만, 왠지 저에게 몸도 마음도 유약한 남동생이 있었고, 그 애를 잃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고통스러웠습니다. 남동생에서부터 슬슬 우울증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호랑나비가 정말 후유증이 많이 남았습니다... 아, 지나치게 날이 선 무언가에 심장 단면이 베여나간 것 같았어요. 중간까지는 그냥 그랬습니다만 문제의 여자가 등장하고 난 다음부터...ㅠㅠ 여자가 미소 지으면서 혼자 떠나갈 때 상실감 때문에 뭔가 가슴에서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힘들었어요.

소각로는 딱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답니다.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과제로나 리포트로나 학교에 창작소설을 써낼 때, 물론 에쿠니 가오리에 한참 못 미치지만, 소각로 같은 분위기로 글을 쓰는 편이거든요. 주된 인물과 그 인물의 성격까지... 스즈키 진타라는 학생에게는 저도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왜 떠나는 거야, 하던 주인공의 원망에 깊이 이입했네요. :)

재미빵은 신이치 삼촌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라딘 소개글에는 신이치 삼촌이 호칭만 삼촌일 뿐 친가족이 아니라는 듯이 쓰여있던데 제가 읽기에는 진짜 삼촌인 것 같던데요? 제가 잘못 읽은 것일까요~? ;)

장미 아치에서는 거짓말쟁이 소녀가 등장하지요. 학급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숱하게 당하는 설정이고요. 에쿠니 가오리의 <소란한 보통날>을 읽을 때도 느꼈는데 에쿠니 가오리는 따돌림이라는 소재를 극적으로 비참하게 그리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더욱 곤두선 듯이 느껴집니다. 매번 인상 깊어요.

하루카에서는 하루카라는 참 예쁜 친구가 중심인 이야기인데 예상은 했습니다만 결국 하루카의 남동생은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아서 제 기분을 묵직하게 했습니다. 계속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집이 여름 햇살만큼 한없이 찬란하고 수박 즙처럼 달달하지만은 않아요. 음습한 습기가 곳곳 배어들어 있답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고요.

그림자는 아무래도 그림자처럼 구는 동성친구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방식이 역시 조금 오싹하기는 한데 분명 밉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그림자 친구입니다. :) 주인공이 종이비누를 좋아하는데, 그 부분 문장이 너무 예뻐서 옮겨 적어 놓았기 때문에 다시 써 봅니다. 171페이지예요. '종이비누는 얇고, 밝은 분홍색과 초록색이었다. 가루를 살짝 뿌린 듯한 표면에는 깎아낸 흔적이 산뜻하게 남아 있었다.'

음, 상큼하기만 한 소설을 기대하실 수도 있는데(제가 그랬지요) 물론 에쿠니 가오리 작가님의 청순한 문체는 투명하고 청결하기 그지없지만 마냥 어여쁜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절대) 않아요. 오히려 좀 싸하고,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고 묵지근한 기분을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 그리고 유년이 서정적이었다 하시는 분들은 향수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향수란 참 이상하죠. 너무 그리워서 앓고 있으면 괴로운데, 빠져나가고 싶지 않고, 보석처럼 소중하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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