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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 ㅣ 영조 시대의 조선 11
김백철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4년 6월
평점 :
이 책의 발문에는 박문수 생애 전반에 대한 작가의 평이 간략히 실려있다.
박문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실록에는 그의
한평생을 간략히 정리한 졸기(卒記)가 실려있다.
여기서는 그가
“춘방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에게
인정받았다”고 하여 국왕과의 오랜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무신년 역변때에 조현명과 더불어 함께
원수(오명항)의 막부를 도와 개가(凱歌)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공신이자
재상이었던 박문수의 지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호조 양부(兩府)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을 장악하여 사졸(士卒)의 환심을 얻었다”고 하였다.
병권을 장악한
사실과 재정개혁 전문가로서 보여주었던 면모를 평가하고 있다.
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업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점으로
“연석(筵席)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우습고 익살스러움)를 하여 거칠고 조잡한 병통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연석에서
일상적으로 신료들과 마찰이 있었던 사실을 우회적으로 기록한 듯하다.
아울러 그가
“평생 이광좌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그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고,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또한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는 평으로 끝을
맺었다.
또한 암행어사에서 벗어나서 경세관료의 측면에서 인물 탐구에 나섰다.
박문수의 이미지는 개인의 행적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그가 대표하였던 18세기의 어사의 면모가 향후 약200여년에 걸쳐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부터 야담집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소설로 재등장하였다. 전국적으로 구전되고 있는 민간설화를 살펴보면, 약300여편이 넘는 박문수설화가 존재한다. 특히, 영조~정조년간에 파견된 수많은 어사들의 전국적인 활약상이 박문수 일개인의 설화로 집약되었다. 모순된 현실을 접할수록 이를 타파해줄 영웅에 사람들은 목말라하였으며, 이것이 역으로 조선시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봉건사회’의 이미지나 모순타파를 통한 ‘중세해체기’의 설정 등은 중앙정부의 능동적 역할을 거의 무위로 돌려버렸다.
하지만 어사는
능동적인 왕정의 일면이였다.
박문수는
어사 활동 외에도,
중앙정계에서
책임있는 중신으로서 정부정책 대부분에 관여하였다.
박문수를
영웅으로 바라보면서,
그가 실제
입안한 정책과 참여한 조정은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평가는 일견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시각이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식민사학의 극복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학계에서는
이러한 선입견이 더이상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이미
1980년대 붕당정치론과
1990년대 탕평정치론 연구는 일대 전기를
마련하여,
더이상의 재야의
지식인이나 사회경제적 변화상만으로 근대를 지향하였다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정부의
능동적 역할을 새삼 재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연구사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박문수에게서만은 봉건사회의 부패관리를 때려잡는 암행어사의 이미지만이 덧씌어져 있었다.
이는 그동안
학계에서 이룩한 눈부신 연구성과를 무위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는 조정의 활약상을 재조명하여,
조선왕조가
사회변동기에 직면하여 행한 능동적인 정부정책들을 시론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전설과 식민사관에 갇혀있던 박문수를 다시금 역사 속 인물로 되살려내어,
당대의 시대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