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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폐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이게 무슨 자폐냐 하는 리뷰를 봤는데, 자폐가 맞다.
이 책의 전반부를 읽는 게 나한테는 너무나 힘들었다.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고, 읽기 어려워서도 아니다. 바로 루와 내가 너무 비슷해서였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겨우 어린 시절의 내가 자폐 성격이 강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루의 생각 하나하나가 나에겐 마치 굵은 글씨나 따옴표를 친 것처럼 보였다.
루는 어딘가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나는 정도가 약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한 부분을 몰랐다. 더구나 그 때는 자폐에 대한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단지 심하게 내성적인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나이가 들수록 견문과 인간 관계가 넓어졌는데도 없어지지 않는 불편함들을 보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슬슬 들던 차였다.
자폐란 단지 대인 관계를 수줍어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지의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폐의 정도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종의 스펙트럼을 이룬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서야 그런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이공계열에 이런 성격이 많이 포진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은 사회 생활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어떤 사람은 큰 곤란을 겪기도 한다. 반면에 집중하고 분석해야 하는 일에서는 뛰어난 엉덩이 접착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때로는 모두가 웃는 농담이나 코미디를 보면서도 웃지 못한다. (이 역시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는 대부분의 농담은 이해하지만 약 10% 정도는 모두가 웃어도 웃지 않는다. 십대에는 누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해서 놀리려고 할 때 그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경우도 있다. 보통은 "에이,놀리는 거죠?"라고 말해야 할 타이밍인데,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자폐적 성격을 만약 제거하게 된다면 그 나는 나일까?
이 책은 그 부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을 SF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본다. (우주선이 아니고..)
솔직히 나는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어떻게든 없애든가 약하게 해보려는 노력에 성장기를 거의 다 써버렸다. 겉으로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핵심의 핵심은 여전히 고칠 수 없었다. 태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8살 무렵에는 지나가는 어른들, 친구들, 여튼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_-; (=어제도 보고 오늘도 봤고 내일도 볼 건데 무슨 인사를 한단 말인가?) 그냥 안 하면 쳐 맞으니까 했을 뿐이다. 지금은 인사가 존재하는 이유를 잘 안다(하지만 여전히 실천은 부실). 이십대초반까지는 '아무 목적없는 잡담'을 하는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냥 듣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필사적인 노력은 계속됐다. 결과적으로 몇몇 현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나서 행동했지만, 어떤 것은 여전히 인지할 수 없기에 바꾸지 못했다. (뭘 고쳐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물론 자라면서 누구나 전반적으로 인지 발달이 이루어지기에 바뀐 것도 있는 것 같다.
바뀐 나는 대인 관계 속에서 얼마간의 평화로움을 얻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다만 부작용이 있다. 종종 다른 사람들의 인지를 빌리게 되면서, 나 자신의 판단에 대한 자신감이 부실해진 것이다. 특히 과도기에는 어떤 사회 관습은 단지 흉내만 내는 것도 많았다. 흉내는 진짜를 따를 수 없고, 어색함은 완전히 없앨 수 없었으며, 내가 따라쟁이가 된 듯 잘못된 느낌도 받는다.
만약 책에 나온 대로 기술이 발전하여 아예 뿌리뽑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드디어 자유로워질까?
아니면 갖고 있었던 다른 능력도 함께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오히려 반드시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좀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루는 개척자이고, 용감하고, 더없이 매력적인 사람이다. 책 앞쪽을 힘들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큰 발자국을 가슴 속에 남겼다. 자폐는 특정 몇몇 사람만의 '문젯거리'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집중력 높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뒤늦은 연구에 따르면 아인슈타인도 그 괴벽을 보면 아마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자폐에 대한 이해는 둘째치더라도, 사람 사이에 어떤 것이 오가게 되는지, 어떻게 정신이 성장해야 하는지, 나란 무엇인지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거의 나오자마자 주문해서 봤었는데, 최근에 정신의학 쪽 직업을 가진 지인이 이 책을 무척 잘 읽었다기에 생각나서 리뷰 남긴다. 아직도 책장에 꽂힌 많은 책들 사이에서 이 책은 유독 눈에 띄고 다섯 배쯤 무거워 보인다. 무게가 무거운 게 아니라 그 내용이 밀도가 느껴지기에. 유수의 고전 문학과 맞짱을 떠도 조금도 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작품이다. 게다가 재미있다. 이런 작품이 SF의 대열에 있다는 것이 SF독자로서 너무 뿌듯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