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평전 - 유가의 1인자 미다스 휴먼북스 2
천웨이핑 지음, 신창호 옮김 / 미다스북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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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자는 곤궁하고 빈한한 가정환경 탓에 부잣집 자제와 같은 기품이나 자태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은 공자의 마음 속에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진취적인 의지와 열정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공자는 이미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공자는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고 여겼다. 때문에 거리며 사회 곳곳을 교실이자 학교로 삼아 수시로 아무 곳에나 서서 사람들에게 배움을 갈구했다. 즉 무학의 통찰이다.

 

관직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의지할 곳이 없음을 걱정하라.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남이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공자는 정치적 지위 상승의 길에서 좌절한 뒤, 의연히 문화 지식의 산봉우리에 우뚝 섰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집 안 작은 뜰에 강단을 세웠다. 강단 주변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은행이 많이 열렸는데, 이는 온 천하에 그의 제자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공자는 행단강학, 그의 선생으로서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그 해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사상을 자신들의 손길이 닿는 어느 곳에든 전파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유가학파]가 형성되고 발전한 것이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파이다.   

 

공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시대 현실의 모순이 빚어낸 펼연적인 결과였다.

 

공자는 이제 마흔 살이 되었다. 공자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줄곧 그가 원하던 정계 진출의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읊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 더 이상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는다."

 

공자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키려면 적절한 수단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는 말했다. “내 나이 쉰, 이제야 천명(天命)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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