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삶의 여백에 담은 깊은 지혜의 울림
박완서.이해인.이인호.방혜자 지음 / 샘터사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 박완서와 이해인 -

내가 세상에 많이 찌들었나? 처음 10장정도 읽었을 때 남의 옷을 주워 걸쳤는데 우연히 그 주인을 만난 것 마냥 두 분의 대화는 거북하고 피하고 싶은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진심으로 하는 대화가 맞는 거야? 어째서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걸까..

이해인 수녀님은 본인이나 가족이 억울하고 참혹한 일을 겪었다 하더라도 이렇듯 이해의 글을 적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끝내는 용서를 했겠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본인 가슴속에 있는 종교를 내세워서라도 용서를 했을 것이다. 애초에 선인과 악인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선함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고, 좀 더 악함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들의 구분은 어느 정도 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수녀님은 수녀님이 원하는 선함에 다가갈 수 있는 천성을 갖고 태어나신 건지도 모르겠다.

종교인은 속세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속세에 찌들어 살지도 않으니 내 아픔보다는 타인의 아픔이 더 잘 보이고, 그래서 그런 아픔을 덜어 주려는 생각으로 기도하다보면 그 믿음 때문에 그런 힘든 삶이 가능한 것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아보지 못하고 남녀사이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수녀님이 뭘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또한 수녀님이 하시는 베푸는 사랑의 의미를 모르며, 경험해 본적도 없다. 어쩌면 본인이 아닌 상대방은 서로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화도,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 최소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한다면 타인의 아픔이 보이고, 그 아픔을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이 가능한 일이겠지. 나는 종교가 없지만 결국 글에서의 하느님의 뜻과 사랑이란 자신의 의지라 생각된다.

두 분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는 처음에 어색해했던 대화들은 내 기억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렇듯 전체의 일부는 지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그동안 그런 말을, 진심이 담긴 소리로 들어 본적이 없고, 진심어린 소리로 해 본적이 없어서 그렇게 어색해 했었는가 보다 하고 스치듯이 생각했다. 내가 나이가 더 들어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될 즈음에 나는 무엇을 알고 있고, 또 무엇을 배워가고 있을까.

‘슬퍼할 땐 무관심이 최고의 위로’다 라는 말을 배웠듯이 말이다.
내가 아직 모르는 연륜의 세계가 날 설레게 한다.

- 방혜자와 이인호 -

나와 다른 점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라도 항상 배울 것이 있듯이 미국이라는 나라 또한 우리가 배울 점을 분명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에게 고마움이란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새끼를 도와준답시고 새끼가 알을 깰 때 껍질을 까주면 그 새는 금방 죽거나, 알에서 나와서도 비실대며 건강하게 살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의 핍박을 받던 그 시대에 우리의 민중의식이 걸음마를 내딛으려고 일어서려고도 하기 전에 미국이 주었다던 그 도움이 진정한 도움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도움이 되고 싶었다면 걸음마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미국의 도움이 일제해방에 결정적 역할이라 보기엔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보인다.

실제적으로 나를 포함한 전쟁이후 세대들은 그 실상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상상을 한다해도 진실의 부분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을 그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후 세대의 배부른 몰상식 이라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부터라도 역사공부를 해야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있었던 사실만이라도 내 자식들, 손주 들, 옆집아이들에게 역사의 한 부분이라도 말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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