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월드 -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디자인
앨리스 로스손 지음, 윤제원 옮김 / 안그라픽스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디자인은 전공 분야가 아닙니다.’

‘요즘은 상업 영역에 자리 잡은 개념 아닌가요?’

‘있어 보이는 사유의 결과물일 테죠.’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어렴풋이 떠올릴 것이다. 디자인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고, 체감하는 디자인이란 주로 상업 제품군이며, 디자이너들은 박학다식하고 자기 철학이 있는 지식․전문인으로 느껴진다.

 

 

디자인 영역에서 공부하고 일하지 않는 이상 디자인은 그들의 영역이고, 우리(디자인 비전문가)는 그들의 결과물이 자아내는 소유욕과 편안함을 만끽하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견고한 줄만 알았던 디자인 영역이 점점 문을 열고 여러 분야에 손을 내밀고 있다. 이 책도 그중 하나다.

 

 

‘헬로 월드’는 유명 디자인 평론가인 앨리스 로스손이 8년간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에 기고한 칼럼들을 재정리한 책이다. 디자인 입문서, 역사서, 에세이, 사례집과 같은 느낌을 준다.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에 성공하면, 프로그래머들은 작동 여부를 확인할 때 ‘헬로 월드 프로그램’으로 새 언어를 테스트한다고 한다. 두 단어가 새로운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셈이다. 저자는 이에 비유하여 디자인 또한 새로운 무언가를 여는 시작이라고 설명한다.

 

 

 

 

 

 

p.37 디자인은 계속해서 변화의 주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인간의 필요와 바람에 따라 삶을 구성하도록 도와주고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변화의 주체, 이 문구가 계속해서 디자인을 이해하는 좌표 역할을 해 주었다. 13개의 장과 프롤로그, 에필로그, 저자의 말을 순서대로 따라 읽다 보면 결코 온전히 머리에 맴돌지 않는다. 내용은 어렵지 않으나, 방대한 사례와 텍스트의 양 때문이다. 저자가 공감을 얻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서고금의 여러 디자인 사례가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제부터 18세기 해적, 산업혁명 시대에 대량제품을 제작한 장인은 ‘디자이너’로 바라본다. 무기, 깃발, 가구, 전자기기뿐 아니라 소외된 이웃을 돕고 자연파괴를 막는 기술과 캠페인도 디자인으로 소개하는 이유를 디자이너 모호이너지의 글을 인용한 대목에서 확인하였다.

 

 

 

p.54 디자인은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일상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문제로 수렴한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일상 디자인이 널리 퍼지면 어떤 직업군에 속한 사람이든 디자인에 기여하려 할 것이다. 디자인 활동은 모두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디자인을 일상으로 소환하였다. 이는 디자인을 특별한 영역에서 생활 곳곳으로 확장한, 우리 삶이 디자인이라는 사고와 행동, 제작 방식이 결합하여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좋은 사례로만 디자인을 예찬하지는 않는다. 불편함과 환경 문제를 초래하는 ‘나쁜 디자인’들도 소개한다. 디자인을 인간의 일이며 역사의 과정으로 인지하였기에 가능한 평론이라고 생각한다.

 

 

 

p.92 ...우리는 디자인의 편리함보다는 불편함을 더 쉽게 체감한다. 뛰어난 디자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디자인이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면 우리는 디자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문제를 해결하거나 성과를 내고 자신에게 공을 돌린다. (중략) 디자인이 잘 됐다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결과물을 직관적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디자인은 외관의 미학과 기능의 우수성을 넘어 우리의 행동을 관장한다. 그 때문에 디자인된 대상을 평가할 때, 사용자들이 불편함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현상이 잦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의족, 지하철 노선도, 제약 등이 이러한 현장의 ‘불편한 목소리’에 디자이너들이 귀 기울여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상으로 다가온 디자인은 문명의 발전, 수공업, 대량생산, 제품 경쟁시대를 지나 더욱 크고 중요한 미션을 갖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유용성, 독창성, 협업 (정보 공유), 지속가능성 (친환경)이다. 이 중에서 기본 중의 기본은 예나 지금이나 유용성임을 강조한다. 책의 한 장을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두고 소개한 ‘애플’사도 같은 입장이었다고 한다.

 

 

 

p.133 잡스는 제품을 보기만 해도 사용법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이팟이나 아이폰 같은 새로운 제품은 과거에 출시했던 제품처럼 고객에게 외면당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애플 제품(대량생산 이후 가격대는 저렴하면서도 디자인과 성능은 우수한, 대중의 흥미와 구매를 자극하는 제품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이를 ‘알파 제품’이라고 한다.)을 처음 사용하였을 때 많이 헤매거나 데이터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애플이 추구하는 ‘설명서 없이도 직관적으로 인지하고 쉽게 사용하는 제품’에 대해 미심쩍기는 하나, 서구권에서 애플 제품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강하기에 일단 수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애플의 장점만을 부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나고 우수한 제품일지라도 이제는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인 디자인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좋은 디자인을 규정하는 데 협업과 지속가능성을 새로이 강조하는 것도 이와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12장 ‘나를 드러내는 디자인’, 13장 ‘소외된 90퍼센트를 위한 디자인’ 그리고 에필로그에 잘 나타나 있다. 디자인 또한 규격에서 교감으로 성격이 변화하며 유용함을 기본삼아 삶에 관여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자이너가 결정하기보다는 디자이너에게 개인의 의견을 반영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p.249 ... 시간이 흘러 대중이 규격화의 장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잡음이 생기고 대중은 개성 있는 제품을 갈망하게 된다. 빈티지 패션이 인기를 끌고 수공예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휴대전화에 다는 액세서리가 유행하는 현상은 모두 소유물에 대한 자신의 특성을 반영하려는 시도의 결과이다.

    

 

 

이처럼 디자인이 소수의 권력에서 대중으로 그리고 개인에게 다가가면서, 디자인은 ‘응용미술’, ‘제품 제작’을 넘어 사람을 바라보며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과감히 확장하고 있다. 13장은 이익창출에서 공익 창출로 변화한 디자인 사례를 소개한다. 낙후지역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윈저의 버티얼리컬리지 고등학교에서 진행한 디자인 수업 ‘스튜디오H', 런던의 빈곤한 자치구 서더크의 노인들의 활력을 되찾아낸 활동을 디자인한 그룹 ‘파티시플’, 빈곤 국가 어린이들에게 직접 제작한 저가 컴퓨터를 판매하고 캠페이를 벌인 ‘OLPC프로젝트’ 개발도상국 출신 디자이너들이 자국에서 진행한 친환경 프로젝트 등 다양하다. 물론 남아프리카 현장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제작하여 실패한 ‘플레이펌프’ 프로젝트 사례도 나온다. 저자는 파티시플을 창립한 사회학자인 힐러리 코탐의 말을 인용하여 이와 같은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의 특징을 설명한다.

 

 

p.268 디자이너는 인간의 동기와 염원, 욕구를 잘 이해해요. (중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필수적인 수평적 사고에 능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 사람들의 참여를 도할 수 있죠. 디자인은 여러 도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매우 특별한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디자이너가 제품에서 지역으로, 사람으로 시선을 넓히면서 가속이 붙고 있는 인도주의 디자인에 대한 자가 점검도 동시에 면밀히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한 때, 1704년 판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디자인을 ‘교모한 장치’ 혹은 ‘상대를 해하기 위해 꾸민 책략’으로 소개할 만큼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부정적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디자인은 상업 영역에 묶여 있지 않고, 종합 디자인으로써 사회 곳곳에 유익함을 전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디자인은 익숙한 삶에서 다른 점을 발견하고, 인내하며, 겸손한 자세로 이해를 주고받으며 교감을 통해 유용성을, 추억을,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사고와 행동방식이라고 나름의 정의를 얻었다. 저자는 디자인 예찬보다 디자인의 오해를 풀며 누구나 참여 가능한 영역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해보았다.

 

 

 

(재미있게 읽는 방법)

이외에도 애플의 사례, 미술과 디자인의 구분, 로고의 기능, 스토리텔링과 인포그래픽의 시효, 친환경 디자인의 어려움도 상세히 소개하였다. 단, 내용이 시공간과 단락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기술되어 있어서 종종 맥락을 놓치기 쉬우니 한 번에 몰아서 읽기보다는 한 장씩 나눠서 읽는 것을 권한다. 흥미로운 점은 페이지 곳곳에 관련 사진들이 실려 있는데, 장과 상관없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읽다 보면 이 내용이 이전에 나온 사진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고 되돌아가 사진을 살피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사진이 실린 장을 다시 읽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이 사진들은 저자가 글과 이미지에 지치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며 여러 차례 읽어보라는, 흥미로운 책갈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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