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르 코르뷔지에 지음, 최정수 옮김, 한명식 감수 / 안그라픽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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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이 책은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여행 기록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한 문장만 던져놓고 싶은 충동도 생깁니다.

 

100여 년 전, 동유럽, 젊은 건축학도, 미학, 역사, 문화......

 

어디에도 2014년 동북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 살아가는 청년과의 접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혈기왕성한 청년의 글은 하나의 글 안에 여러 주제와 소재를 오고가기에 다음 문장을 따라가기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근대 건축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라는 르 코르뷔지에,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와 같은 나라들에 대한 기본 정보가 없으면 즐거운 독서를 하기 어렵습니다. 별도의 주석과 연보가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여행자의 느낌으로 책에 몰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작가 연보를 보면 여행 당시에 수첩 여섯 권 분량의 데생과 크로키, 메모, 수백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 시각자료들이 책에 풍성히 실렸으면 일반 독자들의 조금 더 ‘감성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는 딱 두 장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그 외의 정보가 없어서 감을 잡기 어려웠습니다. / 파르테논 신전 사진이 담긴 엽서가 한 장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참고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는 제 나름의 두 가지 기준을 놓고 천천히, 느린 호흡과 흐름으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하나는 ‘이십대 중반의 르 코르뷔지에의 이미지만 떠올리며 읽기’, 그리고 ‘그 청년이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보기’였습니다.

 

 

 

이 사진이 청년 르 코르뷔지에입니다. 말수가 적고 조용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글을 보면 생각과 감정이 넘칩니다. 사색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대비 덕분에 글로 (그림으로) 풀어낸 저자의 열정은 거침이 없습니다.

 

 

 

20세기 초반은 상품화된 여행보다 유랑하는 여정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여행이 관광산업이 된 오늘날에는 저자와 같이 타국의 생활 깊숙이 스며드는 일을 경험하기는 어려워졌죠.) 더디고 불편한 이동과 숙박임에도, 약 5개월 간 미술사를 공부하던 친구 오귀스트와의 여행은 청년 예술가가 무언가에 눈을 뜨고도 넘치는 귀중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다, 회의적인 아가씨들이여. 여행이라는 것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행에 대한 사랑 속에서 조금씩 더 고귀해진다. 내 신념에 따르면, 여행은 모든 것이 사회주의화하는 요즈음 찬양받아 마땅한 일이다. (p.20)

 

 

 

여행이 가져 올 것들에 대한 믿음으로, 자느레 (본명)이자 르 코르뷔지에라는 프랑스 청년은 오래 이어 온 전통, 감성, 조화로운 세계와 문화에 극찬합니다.

 

 

 

농부들의 예술은 변함없고 따뜻한 애무로 대지를 감싸 안고, 인종, 기후, 장소에 상관없이 조화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대지를 덮지. 농부들의 예술은 아름다운 동물로서 살아가는 기쁨을 제한 없이 드러내. (p.25)

 

 

 

이곳 사람들은 집을 지나칠 정도로 정성 들여 돌본다. 그들은 자기 집이 깔끔하고, 즐겁고, 편안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집을 꽃으로 장식한다. 또한 삶의 기쁨을 나타내주는 환한 색깔로 수놓인 옷을 입는다. 식기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예술적 향기가 넘쳐난다. 세심하게 관리하는 마룻바닥에는 여자들이 오래된 전통에 따라 직조한 양탄자가 덮여 있다. 매년 봄이 되면 그들이 사랑하는 집은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옷이다. 하얗게 칠한 집은 여름 내내 나뭇잎과 꽃 속에 미소 지을 것이다. (p.59-60)

 

 

 

저자는 요란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것보다 자연과 어우러져 오래토록 이어 온, 쉽게 인지되는 직관을 갖춘 단순한, 생명력으로 넘치는 삶의 현장에서 예술을 발견하고 예찬합니다.

 

   

 

나는 그저 사물의 장관을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내가 만난 아름다움을 진실한 말로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p.59)

 

   

 

낯선 세계의 사람들이 만든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알리려는 그와 현재의 독자를 공감시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관광객들과 마주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여행 수첩에 이렇게 기록했다. 관광객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속물스러운 행동을 일삼는다. 평소에 지내던 환경 밖으로 나오면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쉽게 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관광객들을 바라본다. 아니,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갖가지 명소 이름을 큰 소리로 떠벌리며,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성큼성큼 돌아다닌다. ....... 그들은 예술작품을 보고 경탄하지만 예술가에 대해 성찰하는 법은 없다. (p.183)

 

 

 

스스로 경험하기를 원하는 젊은이의 여행은 좀 더 천천히 이뤄지는 성찰을 지향하기에, 돈과 시간만 있으면 어디든 다니며 지식을 뽐내고 무언가를 배우고 깊이 느끼지 않는 이들의 여행 방법과는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요란스러운 관광객에 대한 불편함은 시작되었네요.

 

 

 

 

청년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여행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시골 마을의 집과 도자기를 만나고, 이국의 오래 살아남은 건물들을 보고, 그 안에서 넘치는 생명력을 자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풍습에 감동받고 존중합니다. (여행지에서 겪은 불쾌감과 실망감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쩐지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여행의 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

 

  

 

지명, 지리, 역사, 건축 양식과 관련된 정보들에 익숙하지 않다면, 인터넷 검색으로 해당 이미지를 찾아보면서 읽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와 공들일 시간에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책만 읽어보세요. 원래 일기, 여행일지는 내 자신이 첫 번째 독자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여행, 미학서적 이전에 한 예술가의 생각과 교감하는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빛나는 문장, 망설이는 문장, 확고한 문장, 끊임없이 되묻는 문장으로 가득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 동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는 쪽보다는 여행지, 낯선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며 느끼고 내 감성과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지에 대한 예시를 얻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르 코르뷔지에 자신에게도 54년이 지나 출간한 당신의 책을 보며 에너지를 많이 얻었을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하렘은 한 편의 시와 같은 궁전이며, 모방할 수 없는 우아함을 지녔다. 역광을 받은 빛의 안개들이 바다 위에서 녹고 있었다. 마리마흐까지 펼쳐진 역광이 투명함이 사라진 하늘에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런 엄청난 장관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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