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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의 기억
에드문드 데스노에스 지음, 정승희 옮김 / 수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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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소설이 나빠서가 아니라, 좋아서도 아니라, 그저 너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에드문도 데스노에스는 쿠바 혁명에 적응하지 못한 쁘띠 부르주아지의 텅 빈 삶과 내면을 지독히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의 내면은 어딘가 지구 반바퀴 너머에 살고 있는 나의 내면과도 닮아있다. 내가 만약 저 시대 저 곳에 살고 있었더라면, 이 주인공보다 더 그럴듯한, 덜 피폐한 일상을 구가할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 없다. 평소 지나치게 멀리 있던 혁명은 어느날 머리 위에 핵폭탄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불안감과 함께 갑자기 내 일상에 쳐들어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바람둥이 십대소녀를 건드리다가 재판을 받고 겨우 풀려났을 뿐이다. 나는 그저 그런 인간인 것이다. 그리곤 어쩌면 곧 하늘에서 떨어질 원폭을 걱정한다. 혁명이야 될 대로 되라지. 여기서 죽기는 싫다. 이 미개한 저개발국에서 의미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이렇게 죽기는 싫단 말이다.
<저개발의 기억>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알던 쿠바혁명은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내려온 텁석부리들이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민중에게 자유를 선사한 영웅적인 이야기였다. 그 수염에 대해 카스트로는 "산속에선 질레트를 구하기 어려웠거든요"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하여튼 카스트로라는 텁석부리는 제3세계 혁명의 모범이 되었고, 체 게바라라는 텁석부리는 제3세계 혁명과 제1세계 패션의 모범이 되었다. <저개발의 기억>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수염을 기를 필요가 없었던 쿠바혁명의 패배자, 아니 승자도 패자도 아닌 방관자의 일상을 너무도 정밀하게 보여준다. 아, 내가 저 곳에 있었더라면, 나는 텁석부리였을까, 매끈한 턱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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