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만든 세계사
함규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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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관계 사이의 단절을 말할 때 쓰이는 표현으로 ‘벽을 친다’란 말이 있다.이 말은 말 그대로 벽을 쌓는다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때로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 때문에 벽을 치는(hit) 것처럼. 화난다고 벽을 치면 제 손만 아플 뿐이긴 하지만.


분노의 이유가 다양한 것처럼 벽을 쌓는데에도 제나름의 사연이 있다. <벽이 만든 세계사>는 그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 “이 책을 쓰는 데는 장벽을 짓는 만큼이나 많은 시간이 들었다”고 적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방대한 정보들을 보며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두개의 벽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생존이다. 만리장성부터 트럼프 장벽에 이르기까지. 주어만 다를 뿐, 벽에는 생존을 위해 흘린 피, 땀,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걸 보려면 눈보단 마음의 태도가 교정돼야 한다. <벽.만.세>는 그 흔적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창과 방패란 표현은 축구 경기에서도 자주 쓰인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리버풀의 수비수 버질 반 다이크라면 단단한 삼중의 벽을 기어코 뚫어낸 오스만 투르크는 그를 상대로 골을 넣은 황희찬이라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이 비유가 딱 맞아드는 건 아니다. 황희찬의 골은 다시보기 버튼을 누르게 만들정도로 멋지지만, 오스만 투르크가 일으킨 전쟁은 그 반대다. 한 사람의 야욕이 지불한 무수한 목숨은 결코 반복되선 안되니까.


적이 언제나 인간의 얼굴을 가진 건 아니었듯, 벽이 항상 석축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호주의 토끼 장벽은 말 그대로 토끼를 막으려고 세운 철조망이다. 이 이야기는 심심한 호주 벌판에서 사냥감이 필요했던 한 영국인이 데려 온 스물 네마리의 ‘영국산 토끼’로부터 출발한다. 그게 수억마리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감당못할 문제에 직면한 호주 사람들이 선택한 건 벽을 쌓는 일이었다. 막으면 그만이라 생각했겠지. 문제는 사람보다 토끼가 많았던 탓에, 철조망을 설치하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토끼들이 비웃듯 지나쳐갔다는 것. 결과적으로 토기 장벽은 목적에 실패했다. 토끼는 죄가 없었다. 생존을 위해 번식에 충실했을 뿐이었으니.


감당할 수 없는 걸 차단하고자 철조망을 세웠지만, 이게 별 소용이 없어지자 인간은 이것들을 아예 없앨 작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선택한 게 생화학전이었다. 사람과 가축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토끼에게는 유효한 바이러스를 살포했던 것. 최근 바이러스에 관한 음모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유가 여기서 출발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해온 전례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란 합리적 의심을 키워낸 걸지도. 바이러스는 효과적이었고 한동안 토끼들의 모습을 서서히 지워갔지만 이내 면역력을 갖춘 슈퍼토끼가 등장했다. 이들은 여전히 호주 땅을 누비고 있다고 전해진다. 코비드19에 노출된 우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쯤되면 벽은 누군가의 의도가 담겨있는 인위적인 설치물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안과 밖은 동시대에도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바르샤바의 게토 장벽과 독일의 베를린 장벽도 그런 속성을 가진 결과물이다. 베를린 장벽 이야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오르막길을 떠오르게 했다. 오르막길이 돌아서면 내리막길이 되는 것처럼, 영역을 구분할 명목으로 쌓은 벽이 동독에 자리한 이들을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체제의 유지 존속이란 점에서도 생존이란 키워드와 궤를 같이한다 볼 수도 있고.


도구의 발전은 전쟁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다양한 무기들은 장벽의 의미를 지워버렸고,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장벽은 주기적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곤 했다. 최근 난민을 배제하고자 등장한 트럼프 장벽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트럼프 장벽은 이 모든 이야기의 끝판왕 같다. 미치코 가쿠타니가 한 줄의 댓글이 아닌 한 권의 책으로 트럼프를 깐 이유는 ‘저 사람이 그렇게하니 우리도 똑같이 대응하자’란 관념을 당연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는 점이었다. 이게 점점 기본값이 된다면, 결국 우리는 '벽을 보고 대화하는 문화'에 어느 순간 젖어들 지도 모른다. 생의 마침표가 그저 숫자로 전시되고, 숫자를 보며 ‘그 일이 내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공포로 와닿는 오늘날은 이미 그런 세상에 근접했을지도 모르고. 2020년을 공유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세대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지점이다.


책을 덮고 남는 잔상이 있다. '태초에 벽이 있어' 구분이 자연스러웠던 게 아니라, 그들과 우리를 분리하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벽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기득권의 오만함을 유리천장(glass ceiling)과 유리 바닥(glass floor)으로 명명하며 가시화 한 것과는 반대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건히 만들고자 높고 단단한 벽을 쌓아왔고, 쌓고 있다.


트럼프에겐 손가락 하나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버튼이 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우리도 손가락 하나로 세울 수 있는 장벽이 있다. 바로 '비공개' 또는 '차단' 기능이다. 최근 관계를 '손절한다'는 표현이 자주 쓰이게 된 건, 맺고 끊는 게 결제하는 것만큼이나 수월해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수단은 분명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손가락이 만들 수 있는 장벽은 차단 말고도 다양하다.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공유하던 손가락은, 이윽고 특정 집단의 속성을 운운하며 선을 긋고 방어막을 만든다. 굳이 기사 하나하나에 댓글을 다는 행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확진자의 동선을 살피거나, 신천지 건물의 목록을 훑는 손가락은 이윽고 공포, 분노, 안도감 중 하나를 집어들고 만다. 나 또한 이 방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광명시의 첫 확진자가 ‘우리집’과 다소 동떨어진 곳에서 거주한다는 점에 ‘다행’이라며 가족들에게 정보를 공유했던 태도에도 그런 게 분명 있었으니.


최근 특정 정체성에 대한 입학 거부 선언부터, 입국 금지와 격리란 벽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이 모든 장벽의 골조 또한 생존이다. 안전을 위한다는 조처들이 다양한 맥락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내 경우엔 재택근무란 벽을 친 상태다. 한때는 재택근무란 상황을 일종의 혜택인 것 마냥 주변에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구분짓는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누군가에겐 상대적 박탈감으로 가닿을 지도 모르는. 이런걸 보면 정말 구분 짓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일 지도 모르겠다. 벽을 치든, 한정판 제품을 구매하든 타자화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만드는 거 말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독자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 게 좋은 글’이라고 말했다. 그 기준을 적용해보면 <벽.만.세>는 ‘독자를 외롭게 하지 않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벽보고 쓴 책이 아니라, 독자에게 친절하게 정보들을 제공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 얘기를 하려던 게 여기까지 왔다. 스크롤을 내리거나 좋아요를 누르던 손가락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봤다. 종이를 넘기고, 타자를 치는(type)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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