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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물 밑에 타는 불
쇼시랑 / 블루코드 / 2021년 10월
평점 :
전 복수라는 제재가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복수를 이미 이루었고 새로운 사람이 된 윈터, 그리고 그런 윈터가 돕는 또 다른 복수, 그것을 욕구하는 마음을 아직 자각하지 못한 레비안, 그런 레비안을 복수로 인도하는 성공자 윈터... 이런 하나의 과정의 굴레가 작품에 드러나 있는 것 같아요. 윈터가 자신의 이야기와 복수를 얘기하며 레비안으로부터 복수심을 이끌어내는 부분은 계속 그 감정을 쌓고, 쌓고, 쌓는 느낌이라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이후에, 결국 그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긴 레비안의 모습은 정말 극에 치닫는 느낌이라 숨을 참았다 터뜨리는 것처럼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말할 건 복수가 다가 아니죠ㅎㅎ 일단 레비안.. 가스라이팅 및 강간, 학대로 인해 트라우마와 두려움이 계속 몸에 쌓이고.. 그래서 노예 신분이긴 해도 윈터 앞에서 너무나도 굴복해하는 모습이 마음 아팠어요. 우아하고, 관능적이고, 가장 귀족적으로 생긴 그에게 동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그의 추락을 직접적으로 맛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심리란.. 뭔지는 알겠으면서도 도저히 용납하긴 어렵고 추하다는 생각은 계속 들더라고요. 정말 또라이 보존 질량의 법칙인건지ㅋㅋㅠ... 자신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큼에도 불구하고, 라미를 구하려 하고 그녀가 안심이 되도록 노래를 불러주는 레비안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리기도 했어요. 라미에게 고마워서 그랬을텐데, 그런 고마움을 아는게 레비안의 성격이고, 그렇게 또 고마워하는 태도는 과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게 틀림없기에ㅠㅠ 슬픔이 교차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윈터도 학창시절의 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그치만 예전의 예상치 못한 레비안의 도움이 자신도 인지 못할 강력한 무언가로 윈터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레비안을 노예로 삼고 같이 지내면서도, 원망의 감정이 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안타까움, 가엾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게 그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하네요. 뭐, 어렸을 때의 레비안 모습도 많이 기억하는 걸 보면 애초에 윈터는 레비안에게 은근 관심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ㅋㅋ
작품에서도 나왔듯이 손톱 위에 작은 거스러미.. 이 표현이 애매한 마음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해요. 애매한 마음이란 음.. 윈터가 초반에 레비안에게 가지고 있던 관심도, 은근한 신경쓰임,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냥 내보이긴 어려운 감정들, 이런 것들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레비안의 전주인들과 절대적으로 다른 점들이 있었기에 결국 윈터도 레비안한테 호감을 산 거죠. 윈터까지 레비안을 함부로 대했다면 레비안은 결국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이미 닫혔는데도 윈터가 다시 끌어내어준 것일지도 모르고.. 사실 윈터가 일단은 레비안이 노예임에도 엄청 잘 대해줬잖아요. (레비안이 원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고, 절대 일반 노예로 대한다고는 말 못할 정도로 다정하게 대하고, 나중에는 납치당한 자기를 구하러 오고... 근데 이런 전체적인 서사도 좋지만 주종관계가 된 둘이 초반에 약간씩 닿는 시선들이.. 저는 그 긴장감이 너무 좋더라고요ㅎㅎ 윈터가 둘만 있을 땐 안 그러면서 은근 명령조?로 레비안에게 반말로 말할 때도 좋고... 외전에서 계약에 관해 두 사람의 앙큼한ㅋㅋㅋ 태도는 진짜 웃겼어요. 귀족스럽게 짓궂은 윈터와 귀엽고 엉뚱하고 그래서 더 매력있는 레비안...ㅎㅎㅎ 은근히 둘이 서로 마음을 확실히 알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ㅋㅋ 그거랑 관련해서 물에 타는 불의 의미도 좀 생각을 해봤는데,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의 마음은 깊은 물로 비유된다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결국 깊은 물 아래에 있는게 불... 물에 타는 불. 그것이 뜨겁게 타오르는 복수심일 수도,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만 확연히 드러나지 않고, 물 같은 어떤 무언가가.. 그것들을 그 이전에는 가리고 있지 않았나 싶고요. 그래서 잘 몰랐던 게 크겠죠ㅎㅎ 마지막까지 둘이 은근히 삽질중이라 마음 졸였는데 행복하게 끝나서 다행이에요. 예전에는 어디로 가야될지 몰랐겠지만 이젠 레비안도 알겠죠. 새까만 눈 안에 빛나는 조그만한 광원. 레비안은 윈터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답게 사는.. 그렇게 눈을 뜨게 되었으니까요.
작가님의 전작도 몇 개 봤었는데, 대화체이지만 독백으로 풀어나가는 전개가 참 흥미로운 것 같아요ㅎㅎ 그래서 레비안이 본인 얘기를 서술할 때 윈터가 무슨 질문을 한 건지 저 혼자 막 추측해보는 것도 재밌었어요ㅋㅋ 레비안 동생인 제너가 정말 특히 유독 형한테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길래 (저야 좋지만.. 레비안한테는 안 좋아서) 나중에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는데...뭐 자업자득이긴 하죠ㅋㅋㅠ 아무튼 외전이 필요해요 외전이... 작가님ㅠㅠ 이건 좀 다른말이지만 인형놀이 중에 여장이 살짝 나왔는데 그것도 정말 작가님께 감사했어요... 제가 라미과인가봐요ㅋㅋㅋ 너무 재밌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