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추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1
듀나 지음 / 알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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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형추>의 원작은 2010년 출간된 앤솔로지 <독재자>에 실린(그리고 작년 출간된 단편집 <두 번째 유모>에서 읽을 수 있는) 동명의 단편이다. 듀나는 이때부터 작품을 장편소설로 확장해서 쓰려고 계획했지만, 트위터에서 한 말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현대사와 연결시키려다 포기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0년이 지난 뒤에야 완성시켰다. (2018년 <민트의 세계> 출간 이후 장편을 쓰는 페이스가 빨라졌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편에 대한 설명을 보면 장편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측면이 달라진 것 같다. 단편의 주인공은 장편의 어리버리 사이드킥 최강우이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듀나가 이런 캐릭터를 긍정적으로 그릴 리가 없으니, 단편은 분명 불행한 반전으로 끝났을 것이다. 주제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단편은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이 많지 않음을,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회와 조직 속에서 더욱 생존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과정을 거대 기업의 우주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반면 장편은 시스템 v. 개인이 아니라 인간 v. 인간을 넘어선 것 사이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대립은 듀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며, 대립에서 언제나 후자가 전자보다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평형추>에서 인간적인 것은 기업의 권력에 집착하는 무리, 거짓 사랑에 취한 남자, 조카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는 노인, 끔찍한 죄와 죄책감이다. 반면 인간을 초월하는 것은 우주, 우주로 향하는 길목을 묵묵히 만드는 AI, 그리고 AI와 교감하는 여성이다. 우주를 바라보는 이들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인간적인 것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무기질적이고 냉혹하다.

<평형추>는 이러한 대립을 철저히 인간적인 존재들의 시선에서 그려낸다. 책 후반 직전까지 인간됨을 벗어나려는 사람은 냉랭해서 인간적 매력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될 뿐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등장한 뒤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화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진상이 밝혀진 뒤, 화자는 이들과 자신 사이의 명백하게 그어져 있는 선을 곱씹으며 퇴장한다. "그대들은 하늘로 가시게, 우리에겐 지상의 일이 있으니."

작가의 의도가 자질구레한 지상의 일을 하는 사람의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의도는 잘 구현된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에는 (예를 들어 <민트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무한한 세상을 눈앞에 둔 흥분이 없다. 하늘로 간 사람들의 작업은 결말에서야 담담하게 묘사될 뿐이다. 그 전까지 그 사람들은 정말로 무기질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지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진실 추적과 액션이다. 그리고 이는 정교한 미스터리와 구성 덕에 막힘 없이 이어진다.

다만 그 과정의 주역이 썩 호감 가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은 단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세 중심인 화자(본명은 오지호인 모양이다), 최강우, 한정혁은 모두 그냥저냥인 사람들이다. 딱히 관심을 가질 개성은 없고, 왠지 모르게 절박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 생각엔 듀나도 글을 쓰면서 화자와 최강우의 거취와 안전에 무관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주연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됐다면 더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단점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모험 이전이 아니라 이후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시시하고 따분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라, 벗어난 이후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제저벨>이 그런 이야기였던가?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안 난다. 이곳을 벗어난 뒤의 이야기는 의외로 별 볼 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사는 모두가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대개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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