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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7년 11월
평점 :
‘좋은 삶’과 산골 사람들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고--
3년 전 우연치 않게 문경의 깊은 산 속에 내 터를 마련하였다. 대학에 몸담은 지 10년쯤 흐른 시점이었지만, 대학이라는 근대적 교육 기관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격의없는 학술적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고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이 대학이라면 대학다운 대학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친한 동료들이 하나 둘 대학을 떠나면서 대학 내에서의 나의 삶은 고립을 면치 못했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내 영혼은 다른 삶을 갈구하였다. 근대적인 것과 가능한 한 다른 삶의 양식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 영혼의 소리는 그 시절 참으로 간절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산골 속 내 터가 장만된 것이다.
당시에는 리 호이나키라는 미국 지식인이 쓴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라는 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장장 6년에 걸쳐 번역하여 드디어 빛을 보게 된 <正義의 길.....>은 시간이 갈수록 자연과 인간성이 황폐화된 세상의 폐허 속에서 진실의 도정(道程)을 찾아가는 저자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그의 자서전쯤 되는 작품이다.
정년보장까지 받은 대학교수였던 리 호이나키가 교수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산골 오지로 들어간 것은 안락한 일상의 삶 너머로 상실되어가는 ‘기쁨으로 충만한 몸의 감각’을 되찾아 진실로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적 자각 때문이다. 그에게 좋은 삶이란 추상적인 세계의 방관자 또는 방랑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일정한 장소의 경계 내에서 매일 같이 대면하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과 친밀한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장소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다음 날 돈을 벌기 위해 그저 하룻밤 잠자고 자연의 섭리를 깨뜨리는 ‘위생적’ 하수처리 시스템에 의존하여 생리를 해결하기 위한, 오로지 기능적인 칸막이 장소가 우리의 집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집을 갖고 산다는 것은 집밖의 이웃들과 어울려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교감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좋은 삶이란 근대적 세계관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르른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개인적 자아는 개인의 정체성과 이해관계에 대한 집중을 통해서 형성되지만 리 호이나키가 추구하는 좋은 삶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 또는 타인과의 어울림을 통해서만 개인이라는 존재가 가능하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이런 ‘좋은 개인’은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공유하는 이웃, 친구, 가족들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는데,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들과의 공동의 노동과 유희 속에 초월적 체험이 가능해지는 또 다른 역설이 성립된다.
나는 리 호이나키처럼 교수라는 특권적인 지위를 버린 것도 아니고 현금경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근대세계의 경계선에서 이제 그 경계선마저 가물가물 지워져 가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근대 이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아직 지니고 있는 시골 노인들의 이야기를 정신을 차리고 들을 뿐이다. 물론 내가 자리잡은 그 곳에서는 농약, 제초제, 화학비료로 범벅이 되어 있는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관행농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숫자와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우리 식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들에게는 타인과의 경계의 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경계까지 해제시키는 그 어른들의 후의와 몸을 아끼지 않는 도움이 없었더라면 첫해의 우리 농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70대 중반에서 80대까지 고령의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그 마을은 적어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자족적인 우주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폐가인 채로 방치되어 있는 집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그 마을에 살고 있던 청년들이 세운 것들이다. 내가 그 곳에서 기거하고 있는 집 역시 아랫집 할아버지가 청년 때 손수 짓고 신혼시절부터 지냈던 집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공연히 내 거처에서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감각 같은 것이 느껴지고--내 이웃의 역사다!--그때마다 어딘가 숙연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마을에 아직 청년들이 많이 살았던 시절에는 초상이 나면 청년들이 관도 직접 짰다고 한다. 연세가 높은 어른들은 자신이 죽으면 관의 재목으로 사용할 나무 둥지에 새끼를 묶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그들에게 온전한 의미의 집이고 우주였다. 마을은 그들에게 매우 제한적이지만 동시에 초월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좋은 삶에 대한 리 호이나키의 추구는 반드시 근대세계의 경계선 너머에 있는 오지 산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근대세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좋은 삶에 대한 추구가 반드시 오지냐 도시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대학 청소부 생활을 근거로 해서는 허드렛일을 습관처럼 반복하는 청소부들의 덕행 실천이야말로 근대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세계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하층계급이 떠맡고 있는 천박한 허드렛일들이고 지배자들의 눈에는 잘 띠지도 않는 일들이지만, 이런 일들을 누군가에게 떠 넘기고 안락한 삶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는 것으로는 오히려 지배질서를 강화시켜줄 뿐이며 오히려 천박한 허드렛일들의 덕행으로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지배질서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아직 나는 교수직을 버리지 못했다. <正義의 길을 비틀거리며 가다>는 내게 몹시 불편한 책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으며 근대세계의 근원적 허구성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독자들이 늘수록 근대의 경계를 넘어설 용기가 우리에게 생길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용기를 내기 위해서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