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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BL] 순조로운 생활 (총2권/완결)
오믈랫 / M블루 / 2017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설정이 무겁다 보니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있습니다. 캠퍼스 배경임에도 읽다 보면 이들이 한창 대학 생활 중임을 잊게 돼요. (실제로 학업을 많이 뒷전에 두기도 합니다)
과외 학생으로 만나 같은 학과생 되는, 이것만 보면 전혀 상반된 장르가 연상되는데요. 사실 이 키워드를 전혀 안 살린 건 아니에요. 단지 그 순조로운 생활이 제림의 삶에서만 존재감이 있을 뿐이죠. 과외 선생인 순조에게 관심을 두는 제림, 그런 순조와 캠퍼스 커플이 되기 위해 대입에 성공한 제림. 지극히 평범하고, 풋풋한 캠퍼스물의 시작과 같죠.
순조 역시 제림을 만나기 이전에는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려운 형편 탓에 꾸준히 아르바이트하며 학업에 열중하고, 불우한 과거사가 있으나 현재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죠. 지인으로부터 특이한 조건이 붙은 과외 아르바이트를 제안받게 되지만 빠듯한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 몸을 파는 것 외에 무얼 못하겠냐는 순조에게는 별반 거리낄 것 없는 조건이었기에, 큰 고민 없이 수락합니다.
제림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불안정해집니다.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에요.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 생활에 몰두하는 특별함 없는 하루가 이어지죠.
제멋대로 굴어 당황하게 만든 첫 만남 때와 달리 얌전해진 제림의 태도에 곤두세운 신경이 느슨해졌을 즈음, 일이 벌어집니다. 강압적인 관계와 폭력. 상상도 못 했던 끔찍한 상황에 순조의 정신은 무너지고 맙니다.
순조로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끔찍한 시작, 그런데도 벗어나지 못하는 순조와 타인의 고통 따위 안중에 없는 제림의 일방적인 연애 이야기예요. 순조의 불안과 제림의 흥미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린 작품입니다.
내내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순조와 그런 순조를 손바닥에 두고 즐거워하는 제림.
어느 인물에 몰입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불안정한 순조에 동화되느냐 이를 멀찍이서 지켜보느냐. 작품 자체는 순조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전개되기에 정신적인 소모가 상당합니다.
비슷한 설정의 작품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심한 수위는 아니에요. 무엇보다 주인공의 애정이 느껴진다는 부분이 큰 차이이기도 합니다. 바로 전에 폭력적인 관계를 적고서 애정을 운운하려니 기분이 묘해지지만, 놀랍게도 사실입니다. 기묘한 관계 속에서도 천제림의 애정은 분명하게 보여요. 다만 평범한 애정과는 한참 방향이 달라, 사람을 자기 의도대로 휘두르려 하고 연애를 말하며 상대의 마음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단히 삐뚤어졌지만 제림이 순조에게 집착하고 순조와 나름의 연애를 하고 싶어 한다는 표현이 끊임없이 나와서, 피폐 키워드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심각한 상황은 나오지 않아요. 제림의 평범한 일상이 순조에게는 불안만 일으키는 두려운 시간이라는 게 주된 피폐 요소 중 하나이니까요.
자기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주인공들과 달리 이것이 애정, 연애 감정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제림은 얌전히 따라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고 마치 사랑을 속삭이듯 협박을 내뱉죠.
다정하게 달래고 예뻐하고, 제림은 대학 생활을 마음껏 즐기며 순조와 연애를 하려 합니다. 저항이 크지 않은 순조이기에 이는 자연히 이뤄질 것으로 보였어요.
하지만, 순조는 불안을 안고 살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현실에 순응하지만 견디는 데 한계는 확실히 두고 있어요. 털을 곤두세우고 나름의 발버둥을 칩니다. 성격답게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많은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우며 어떻게든 일상을 되돌리려 노력해요. 제림의 눈에 띄지 않게 자유를 위한 준비를 합니다.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구는 제림에게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계획은 허탈할 만큼 쉽게 드러나고 맙니다. 본인이 원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행동, 특히 순조에게서 거슬림을 발견할 때 참지 못하는 제림. 결국, 눌러둔 성질을 드러내고 말죠.
읽는 내내 순조의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마음이 많이 약한 아이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상황을 겪고 있지만 크게 무너지는 모습에 저까지도 중심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제림과의 첫 만남부터 줄곧 불안해하던 주인공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얼마나 흐트러지는지,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주인공에게 마음을 많이 준다면 편히 읽기 힘들 것 같아요.
제림의 가벼운 변덕에도 심하게 무너질 때가 있어 읽다 보면 많이 짠해집니다. 애초에 싸움이 안 될 상대를 붙여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해요. 심지어 제림이 하지 않은 행동까지 의심하고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가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제림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작품의 중반부까지 둘의 관계는 그럭저럭 연애의 형태를 끼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 당기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이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조 역시 불안 외에 다른 표현을 하지 않으니까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상대 역시 알아도 모른 척, 관계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순조가 숨겨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둘은 더 이상 껍데기 뿐인 연애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혼자서는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을 알게 된 순조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여러 길을 열어두고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제림 혼자만의 의사 반영된 관계라 어디까지나 그의 느슨함이 있어 유지된 연애였기 때문에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어요.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름의 발버둥을 친 것 뿐인데 성공은커녕 오히려 제림을 자극해버린 꼴이 되었고, 결국 최악의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미 한 차례의 위기 이후 예상했던 마지막이지만, 그럼에도 충격이 컸습니다. 제목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어요. 제목의 의미가 새삼 달리 느껴졌습니다. 제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제대로 인생을 잘살고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착잡해요. 순조에게 애정을 주었다면 후유증이 꽤 심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캐릭터 성격을 살려서 정말 다행인 작품이기도 해요. 작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천제림이 순조를 사랑하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지만, 그 표현은 줄곧 평범하지 않은 형태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반성하거나 달라지지도 않아요. 오히려 독자가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을 서슴없이 택하죠. 연애 소설에서 이런 캐릭터를 끝까지 유지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감탄했습니다.
순조 역시 마찬가지예요. 불안하고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리던 캐릭터가 이런 상황의 마지막에 결국 어떻게 되는지, 잘 그려주셨어요. 인물에 몰입하면 마음이 아픈 결말이지만, 글 자체는 몹시 즐거웠습니다.
일방적인 상황의 연속, 절망과 좌절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해서 자칫 지루할 수 있었지만, 몰입을 돕는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해서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어요.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연애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주셔서 이 또한 즐거웠고요. 한동안은 순조와 제림이 계속 떠오를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