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아래 내용에는 정한아 작가의 <달의 바다>와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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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달의 바다> -

나는 눈에 띄는 재능이나 실력이 없었고 그래서 그를 바탕으로 키운 꿈도 없어서 좌절할 일도 없었다. 기대나 환상을 갖는 편도 아니어서 실망할 일도 딱히 없었다. 싫증을 쉽게 내는 편도 아닌 이유가 필요해서 샀거나 선물을 받아 가지게 된 것을 그냥 죽 쓰는 성향의 사람이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동일한 상품 설명과 가격을 몇 번씩 꼼꼼히 읽고 몇 주 동안 고민하다 결국 사지 않는다. 싫증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작해 보기도 전에 싫증을 내는, 싫증이 디폴트인 사람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위 내용을 보면 굉장히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비관적인 것은 어느정도 맞지만 냉소적일 수는 없는 것이 세상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옷을 언제나 새롭게 매칭하며 농담을 하고 여행을 가고 사진을 찍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게 뭐 대수인가라고 하면 나한테는 경이로운 일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거리를 걷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하는 욕설을 듣게 되거나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담배 연기가 올라오거나 숱한 관심 없음에도 끈질기게 뜨는 끔찍한 뉴스기사에 평소처럼 차갑고 단조롭게 유지되던 머리가 무언가를 하는 사람을 보면 동공을 확대시키고 심장이 더 빨리 뛰게 명령을 내렸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첫 직장에서도 죽 그래 왔다. 남다른 인류애가 있지도 않고 따지자면 개인적인 성향인데 부모님의 덕으로 인복은 타고 난 것인지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반짝반짝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창작자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답답하다. 내 시간을 더 소중하고 찬란하게 쓸 사람이 넘치는데 별 게 되지 않고 즐기지도 못 할 나에게 시간이 주어져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어떻게 해서든 일을 하게 만들다니. 내가 일상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나의 노력보다 운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진심으로 감사한다.

드라마 <중쇄를 찍자!>에서 만화가의 꿈을 포기하고(‘잠시 접고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뒤돌아서서 울먹이며 걸어가는 누마타를 몇 번이나 돌려 봤다. 꿈꾸던 것과 다르더라도 계속 살아가야 되는구나. 내 손으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내 입으로 포기했다고 말하고 내 의지로 일을 구해서 일상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구나. 진짜 잔인하다.

노력과 야망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성공이든 포기든 실패든 책임지고 자기 손으로 해 본 적 없는 사람일 거라고 비뚤어진 생각을 하게 된다. 글 초반에 약간 거짓말을 했는데 좌절한 후 나아가거나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지 않아 답답해서 힘든 적이 있긴 있었다. 어떤 큰 꿈이 좌절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꺾였다. 그에 맞춰 시간이 한 번 멈춰주거나 끊겨주면 좋을 텐데 그래도 시간은 계속 흘러서 잠도 안 오는데 계속 살기는 사니까 말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는 버릇이 생겨서 두피에 상처가 생기고 머리가 많이 빠지기도 했다. 평소라면 나도 모르게 시간이 알아서 흐를 텐데 그때는 모든 찰나가 가슴을 짓누르면서 억지로, 강제로 나를 통과하며 눈을 짓이기는 것 같았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때 느끼기에는 그랬던 것 같다.

고모가 어딘가로 보내는 이백 개의 샌드위치와 할머니가 만든 사과잼의 행방이 궁금하다. 적재적소(음식에게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로 잘 갔을까? 그럴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을 일도 사과잼을 빵에 바를 일도 없겠지. , 환상, 창작물과 그것을 품거나 만든 사람을 절대 비웃을 수 없다. 어딘가에 독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글을 쓰는 작가가 없다면, 내 주변에 꿈, 환상, 흥미를 비롯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하는 반짝이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정말 척박하기만 한 인간에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때때로 거의 확실히) 허공일 곳에 기꺼이 손을 내밀어서 나 같은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어 해야 할 일이 있어도 이렇게 쓸데없는글을 쓴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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