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생태사상가 - 2020 우수콘텐츠 선정작
황대권 외 27인 지음, 작은것이 아름답다 엮음 / 작은것이아름답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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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자급자족과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슈마허라는 인물을 잠시 접했을 때 기억에 남는 문장 중 하나였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예 이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비영리단체가 탄생하고 생태환경문화잡지까지 창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멀찍이서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해왔다. 그러던 중 <작은것이 아름답다>에서 지구별 생태사상가라는 새 책을 펴냈고 이 책을 어떻게 읽었고 나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지글로 표현해 줄 책씨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http://jaga.or.kr/?p=13442 : 책씨 모집글 - <작은것이 아름답다> 홈페이지) 서평을 써본 적은 없었는데 마침 요 근래 머리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질문들이 있어 혹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도전해보았고 좋은 기회를 얻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누군가의 사상에 대해 깊숙이 파고들고 싶은 호기심이 더이상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각자의 심상과 소망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확장해가거나 혹은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것 같았고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믿음과 성격이 비슷해보였다. 진리에 대한 추구는 누구나 하고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사실이고 진실인 것이 정말 존재할까 의문이 들었고 이 생각 혹은 이 말이 맞다’,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합리성을 따지는 판단이 내포되어있는 주장들에 예전만큼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품고 있더라도 나의 일상에서 작게나마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또 빈틈이 많더라도 내가 직접 유익하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실행해보고 수정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생각하는 최고로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꿈꾸면서 그 실체를 발견하고 가꾸어가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이상들을 정작 나의 실제 생활에 녹여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반대로 가는 외부 상황이 더해져 내적으로 불만족스러움이 쌓여가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겸손함보다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지속적인 성찰이 멈춘 자리에는 외부의 부정적인 요인에만 민감함을 발휘하고 엄격한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는 지질함과 오만함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데 나답게 살기 위한 투쟁에 지쳐 자체 요양을 하고있는 상황에서 급진적인 무엇을 혼자 부지런히 꾀한다는 것도 큰 힘이 나질 않았다. 다만 스스로 아쉬운 부분들을 인내심을 갖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내적인 자립을 위한 수련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나 결과가 외부와의 상호작용에서 서로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덤으로 기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겨우 2년동안 게으른 생태농사를 지어 본 경험으로 비춰볼 때 이런 생각은 결국 나 개인의 차원 외에도 공동체라는 존재와 함께 가야 가능할 것 같다고 계속 느끼게된다. 1인가구로서 확보해야 할 식량이 다른 가족들보다 적지만 왕초보가 혼자 감당하려니 나에게는 모두 정직한 노동으로 돌아온다. 작년까지는 그나마 생태농사를 경제적 자립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리듬이 느린 듯 여유가 있으면서도 하루가 충만함을 느낀 적이 많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생태농사를 통해 소비를 적극 줄이면서도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활동을 조금씩 시도할 생각인데 그 현실에서 균형을 잘 맞추지 못하면 버겁게 느껴질 것 같다. 그래서 꼭 이성이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에 공감하는 누군가와 종종 함께 할 수 있다면 생활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동안 어떤 단체에서든,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특이한’, ‘희한한존재로 이해받는 느낌이었고 스스로도 아웃사이더로 규정하면서 점점 침묵이 늘어나고 소통 과정에서 방황하다 자리를 피하거나 깍두기로 존재하는 것이 마음 편한 경험이 많아졌다. 자급자족을 위해서는 느슨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아직은 두렵기도 하고 나에게는 너무 먼 미래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모순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시 생태사상가들의 삶과 생각의 실타래를 더듬어보고 싶어졌다. 특히 나와 심리적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느끼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잘 소통할 수 있고 교류할 수 있는지 지혜를 구하고 싶었다.

 

이 책은 생태사상가 28명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과 성찰을 지구문명의 위기를 읽다’, ‘자연과 사람을 잇다’, ‘오래된 미래에 답하다’, ‘지구별을 껴안다라는 네 갈래로 구성하였다. 첫인상은 사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을 내려놓고 보물찾기처럼 마음이 끌리는 생태사상가와 만나도 크게 문제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생태사상가들이 평생에 남긴 책 가운데 한 권을 선택해서 읽으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시작해야할 것 같은느낌인데 우리나라 생태환경에 비춰 각 저자마다 짤막하지만 알차게 소개해주니 쉽게 읽어볼 엄두가 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점이라면 한 질문이나 개념에 대한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 파고들고 섣불리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아주 방대한 내용일 수 있는 맥락들을 요약한 것이니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진 지도 혹은 종합안내서로 생각하고, 특정한 부분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나의 마음에 꽂히는 부분들을 우선 꼽아보고 선택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점에 주목하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순서대로 읽는 편을 선택했고 책을 빨리 읽지 못해서 아직 앞 두 갈래만 완독한 상태다. 이번 글에는 앞부분이 나에게 새롭게 던져주는 질문과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핵심 단어들, 그리고 좀 더 심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만한 개념, 맥락과 관련 저서들에 대해 기록해보려한다. 뒤의 나머지 두 갈래는 마저 읽는 대로 새로운 글에 담아볼 예정이다.

 

먼저, 슈마허가 첫 장부터 등장한다. 슈마허는 불교 경제의 두 핵심을 소박함(simplicity)’비폭력(non-violence)’이라고 보았고 이것이 성장지상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원리라고 해석했다. 또 적정기술에 대한 세 가지 원리를 말하는데 바로 저렴성, 단순성, 분권성이다.(12) 저렴성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현재 유기농업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전업으로 유기농 또는 자연농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농산물 값이 관행보다 몇 배로 비쌀 수 밖에 없는 것이 경제적 현실이다. 그나마 외부 자원 투입을 거의 하지 않는 자연농을 추구한다고 해도 땅심을 살리는 데까지 걸리는 십여년의 세월은 농업외소득이 있지 않고는 감내하기 어렵다. 자연과 친밀하게 교감할 수 있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이런 농사방법들이 저렴하게 지속가능하려면 공공차원에서의 획기적인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생산자에게 뿐만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도 쉽게 작은 텃밭을 가꾸며 자급자족을 시도해볼 수 있다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유기농이며 자연농으로 생산한 농산물이 자본이 넉넉한 사람들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원으로 전락한다면 적정기술에서 말하는 세 가지 원리에서도 점점 멀어질 것 같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더 읽어보면서 구체적인 사례와 그 원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진다.

 

다음으로 멈포드가 소개되었는데 평소에도 흥미롭고 유익한 글들을 많이 연재해주시는 김성원님이 맡아주셨다고 하니 더 궁금해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본래 기술은 당연히 생명과 삶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개발된 것 아닌가?’하는 질문이었다.(30) 기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아주 절묘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산업사회 이후에는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데 대량으로 생산해내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과 화학물질을 사용하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오래 쓰지 못하고 금방 쓰레기가 되기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고대인들에게 산다는 것은 동굴에 살 듯 서식(Inhabit)’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자연의 외부에서 자연을 지배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깃들어 사는 존재로서 기술의 절제와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4) 공예에 대한 멈포드의 생각을 접하면서 내가 왜 평소 공예에 대한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있었는지도 더 알게 되었다. 공예라는 것 자체가 거대기계와 다른 특성을 가져서 공예인데 근래 우리사회에서 접하게 되는 공예의 많은 부분은 획일화되었고 대량생산되기도 하며 심미적인 요소에 치중해 자연 재료의 제한을 때론 고민없이 넘어서서 환경 파괴에 일조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쁜 쓰레기라는 단어가 더 와닿는 지점이다. 나아가 김성원님은 도시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인 점을 스스로 간과했다는 점을 돌아보면서 적정기술 이전에 도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31) 개개인의 실천 이전에 하나의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의 짤막한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내심 반가웠다. 역사 속의 도시, 기계의 신화 1 : 기술과 인류의 발달이라는 멈포드의 책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성찰이 가능할 것 같지만 엄청난 쪽수의 압박에 차마 시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짧은 소개 속에서도 나의 현실에 더 가깝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도구의 발전이 실제 인간 생활의 개선을 넘어서고 나서도 발전을 거듭한다는 점을 짚었다.(40)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를 근원적 독점으로 꼽았는데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을 특정 산업이 독점해 사업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41) 이런 사회는 개인, 가족, 마을이 집단 능력의 상당 부분을 공유했던 농촌 공동체보다 재해에 훨씬 취약하다. 산업 전문가가 아닌 대중이 쉽게 재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42) 일리치가 제시한 대안은 사회가 다중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존, 정의, 공생공락이라는 기준에 따라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무엇을 더 발전시킬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43) 그 중 아주 인상적이었던 개념이 ‘Conviviality’였다. 잔치에서 여럿이 함께 술을 마셔서 흥이 오른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모두가 적당히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 스스로 억제하고 조절하면서도 그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해야 함께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치의 제시한 대안으로 생각해보면 생태농을 추구하는 느슨한 공동체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이 유지되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조심하고 서로 선을 지키는 자율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머레이 북친은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가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철학과 사상에 쓰이는 전문 용어들이 많아 바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들도 꽤 있었지만 오히려 더 파고들면 균형있는 답을 얻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휴머니즘의 옹호: 반인간주의, 신비주의, 원시주의를 넘어서라는 책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북친은 생물중심주의는 반인본주의로서 심지어 에코파시즘으로 전락할 위험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53)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생태농업을 극단적으로 실천할 경우 '인간'의 자리를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그 점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자연 속에 깃들어 사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 자연에서 인간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배리 카머너가 소개되었는데 그렇게 자주 썼던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환경문제에서 처음 제시한 분이라고 한다!(64) 카머너는 시민과학(citizen science)’ 운동을 이끌었고 위험의 허용치를 평가할 때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대신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 스스로 지역공동체 속에서 그 문턱 값을 결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연구에 대한 결과를 공유하기보다 가설, 실험, 관찰 결과까지 공유하며 주로 과학 정보 제공을 했고 그 결과를 해석할 때 대중을 참여시켰다고 한다.(73) 이 대목에서 GMO 위험성 증명에 대한 논란이 떠오르기도 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안전하다는 결과를 도출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났던 인간과 자연에게 해로운 기형적인 현상들이 분명 있었고 특정한 과학적 증명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세월 국가와 기업에 의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외면당해오기도 했다. 이제라도 어떤 과학적인 사실들이 포함된 문제에 대한 위험성 평가를 내릴 때 시민들과의 충분한 상호 협력을 통해 결정하는 사례가 많아지길 바래본다.

 

다음으로 침묵의 봄으로 유명하다는 레이첼 카슨이 등장했다. 사실 농약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이 소개글을 읽고도 더 들여다볼 마음까지 들지는 않았다. 뒷장의 토마스 베리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보다 우주 이야기를 선택했던 것처럼 매혹적인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이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마련하고 싶다.(95) 사실 나도 GMO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유기농, 자급자족, 느슨한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주입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 확신이 없었다. 그것만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피로가 쌓이게 되고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무언가 긍정적으로 실천하고 성취하는 느낌을 줄 수 있고 유쾌한 문화로 자연스럽게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카슨이 남긴 우리를 둘러싼 바다라는 책이 구미가 당긴다. 바다와 그 속에서 사는 생명들의 탄생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베리의 우주 이야기, 지구의 꿈, 황혼의 사색, 사회성 곤충인 개미 군락의 생활사를 그린 에드워드 윌슨의 초유기체도 마찬가지다. 이어서 국립공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뮤어에 대한 설명에서도 시에라네바다 산맥, 요세미티 계곡을 사랑해 당나귀를 타고 두루 답사하며 자연보호에 일생을 바쳤다는 대목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122) 진정 자연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경험을 했을 것 같아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잠깐 해보았다. 존 뮤어의 나의 첫 여름, 스티킨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감성을 함께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태계의 통합성과 안정성이 황소개구리라는 포식자의 생명 보전 권리보다 우선하고 있는 예가 나오는데 알도 레오폴드가 주창한 토지윤리에서 시작된 것이었나보다. 개체보다 공동체가 우선한다는 전일주의에 뿌리를 내린 것이라고 한다.(132) 안타깝게도 이 글로는 토지윤리와 그것에서 파생된 철학과 윤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머레이 북친이 비판했다던 환경파시즘과도 연결되는 느낌인데 공동체를 위한다고 한 개체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것은 곤란할텐데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전체와 개인에 대한 존중이 부딪힐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윤리나 철학 같은 기준이 있다면 향후 참고하여 다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은 자주 전해 듣기만 하고 잘 알지는 못했던 분들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펴낸 조화로운 삶이란 책은 꽤 유명하다는데도 아직도 읽어보지 못했다. 여기서 소개하는 스코트 니어링이 제시한 삶의 철학 네 갈래 중 두 번째(자신에게 잠재된 힘을 온전히 살리기)와 네 번째(삶 마무리를 자신의 의지로)는 매우 동감하던 바였고 다른 두 가지(하루에 4시간 일하고, 4시간 책 읽고 글쓰기, 4시간 이웃과 교류하기/ 나이를 떠나 서로 사랑하기)는 개인적으로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나에게는 항상 물음표로 남아있는데 위의 책과 그들의 일상 기록을 살펴보면서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지 있을까 궁금해진다.

 

게리 스나이더에 대한 소개는 개인적으로 아직은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라 가장 어렵게 읽었다. 그래도 이 현재의 순간이라는 그의 시선집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스나이더가 살았던 다양한 삶의 이력을 보며 그분이 평생 탐구하고 성찰하면서 자연 속에서 느낀 것들을 표현한 시를 곱씹어보고 그가 공유하고자 했던 감수성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조절 방화를 통해 거대한 자연 발생 산불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처럼 생태계를 진정으로 보존하는 길은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그곳 지역 생태에 조율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한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164) 아마도 다른 지역에서는 조절 방화가 불가능할 수 있고 오히려 인간의 잘못된 개입이 될 수 있는 부분인데 이 지역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조화를 위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마지막으로 린 마굴리스를 읽으면서는 그동안 인류와 세상의 기원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갈증을 드디어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겼다. 마굴리스에 따르면 박테리아가 가이아의 바탕이자 뿌리이다. 박테리아는 대기환경 조성에 참여하며 단순히 자연 선택되고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과 긴밀한 협력관계, 즉 다방향 관계가 성립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지구(생물권)의 자율 조절 체계를 가져왔다고 보았다.(174) 신다윈주의자 그룹과 달리 모든 유기체는 공생체이자 공생 과정이라고 보았다.(176) 성경에서 유일신을 빌어 묘사하는 부분들이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었고, 지구에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존재할 것이라는 조금은 타협한 형태의 막연한 상상에 머물러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마굴리스의 해석에 귀가 솔깃해졌다. 앞서 토마스 베리가 새로운 우주 이야기가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생태대로의 문명적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는데 공생자 행성이라는 마굴리스의 저서를 통해 그것이 가능할 것 같아 꼭 시간을 내서 읽어보고 싶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세상의 시작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분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아직 절반 밖에 읽지 못했지만 다양한 생태사상가들의 삶과 그들이 평생 성찰하고 탐구한 바들을 따라가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내 머릿 속 어딘가에 흩어져 잠자고 있던 작은 씨앗들을 발견하고 깨우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은 것 자체도 너무 오랜만이었는데 좋았고 그동안 해야했지만 미뤄왔던 성찰을 하는 데에 지구별 생태사상가 좋은 계기이자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생태사상가 한 분 한 분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생태 주제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했구나 새삼 깨닫기도 했다. 끝까지 읽고서 다음에는 어떤 주제들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지, 또 발견한 실마리는 무엇이었는지 조만간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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