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감각 - 파리 서울 두 도시 이야기
이나라.티에리 베제쿠르 지음, 류은소라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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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시작하자. “풍경의 감각에서, 조사 가 풍경과 감각을 대상의 관계로 연결한다고 여기고 감각을 패션 감각, 언어 감각, 현대적 감각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우리는 이 글들에서 풍경에 대한 미학론 내지는 이러저러한 풍경에 대한 취향 혹은 입장 표명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가장 순수한 자연도 풍경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시각이 개입된다. 또한 풍경을 즐기는 일은 언제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쾌적한 풍경은 누군가에게 불편한 풍경이 되곤 한다. 따라서 어떤 풍경이 왜 각별하고 어떤 풍경이 왜 우려스러운지를 말하는 일은 대개의 미학이 그렇듯 어떤 어떤 풍경이 우리에게 느끼게 한 미추의 기제 혹은 배경을 짚어보고 그 의미를 새기는 일, 그리하여 또한 보다 나은 풍경을 만들어나가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연결어 가 풍경과 감각을 동사 목적어의 관계로 잇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풍경을 인지하고 지각하는 일부터 화두가 된다. 보기 좋은 풍경, 보기 싫은 풍경이 있기 전에 우선 보이는 풍경이 있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19세기 이전 서구의 민중에게서 제대로 풍경에서 느낀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을 포착하기는 힘들다. 정착해 사는 사람이건 떠돌며 사는 사람이건, 옛 자서전 작가들은 어느 나무 그늘 아래서휴식을 취하며 만족을 느낄 때조차도, 관망하는 만족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기 때문이다.”(<몸의 역사 1. 르네상스에서 계몽주의까지>) 19세기 이전의 여느 필부에게 티에리 베제쿠르씨가 관악산 능선을 타며 느낀 끊임없이 새로 펼쳐지는 풍경”(p. 118)의 즐거움이란 전혀 불가해한 것일 수밖에 없다. 풍경의 인지력도 세련된 풍경 감각을 가지는 일만큼이나 계발될 수 있지만, 비가시권의 것들을 풍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보 수용의 필터 자체를 바꾸어야 할 때가 있고, 따라서 그 확장은 좀더 어렵사리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시각이 우리에게 그 확장을 가져다 주곤 한다.



한겨레 21에 연재되던 이나라의 풍경의 감각을 읽을 때 나는 막연하게 전자로 이해했다. 2부에 실린 그 글들에는 어떤 적극성이, 질문과 제안의 제스처들이 있었다. 랜드마크 건립에 열을 내는 풍조가 우리 몸의 기억과 공감, 창조의 능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격하하는 것”(243)을 우려할 때,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만든다는 전복적(!) 사태를 기이해할 때, “노골적으로 음탕할 뿐 아니라 비루하고 낡은 시대의 상징이 된 방석집이 새로 유입된 중산층 주민들의 민원으로 사라져갈 때, 때로 기이하고 때로 안타깝고 때로 감동적인 이러저러한 풍경들은 언제나 과거와의 대화로 이어졌고, 그 풍경들 속에 기입된 역사, 생활, 문화를 추적하는 작업에는 언제나 더 나은 풍경을 위한, 혹은 더 섬세한 풍경 보기를 위한 희망이 걸려 있었다.

 


제목이 지닌 후자의 의미가 떠오른 것은 같은 글들을, 티에리 베제쿠르 씨가 쓴 1부와 함께 읽었을 때였다. 포착에서부터 문제적인 풍경들이 나타났다. 늘 눈에 들어오면서도 미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발견되고, 익숙한 대상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말많고 탈많은 도로명주소 체계를 대체 어느 한국인이 유용하고 편리하다고 여길 수 있을까? 한국의 건물들이 제각각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자가 놀랐다면, 내 눈은 맞붙어 지은 프랑스의 건물들이 깍둑 썰린 벽들을 내보일 때 매번 놀라워한다. , 화장실에서마저 안내문을 피할 수 없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안내문의 홍수에 피곤해 하느라고 그 단어들이 사전적 의미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발견의 감탄문은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2부에도 이 발견의 감탄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은 방을 유독 좋아하고, 그러고 보니 프랑스의 길거리엔 자동판매기가 없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보기.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만들어낸 것은 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딱히 두 저자의 글이 묶여서가 아니다. 이 글들이 모두 풍경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사실들 사이의 대화, 이곳과 저곳의 다른 요소들이 추출되고 연결된다. 몸과의 대화, 다른 풍경속에서 받은 다른 느낌들이 포착하고 비교된다. 개인에게 새겨진 사회와의 대화, 스스로의 기억과 습성 속에서 사고와 생활과 역사의 몫을 읽어내기. 역사와의 대화, 과거의 자취를 조사하고 미래의 전망을 그려보기.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주어진 사실들이 아니라 물음과 답변이다. 산보객들은 풍경에게 묻고, 풍경과 대화에 들어선다. 그 대화를 통해 산보객들의 시각은 변형되고, 변형된 시각에서 풍경은 다시 감각된다. 풍경의 감각이 언제까지나 이어진다.

 


물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도 있다. 함께 걷고, 각자의 인상을 나누고, 궁금한 것을 서로 묻고, 또한 같은 글을 읽고, 각자 쓴 글을 읽고, 상대의 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들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그러나 시선을 나누는 일은 그 일을 통해 서로가 얼마간 닮아갈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교환으로 다시 사방에 시선을 던지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독자는 이 대화의 기운을 저자들로부터 이어받는다.

 

 


"서울에서 우리는 한 시간 남짓하여 세속의 세계에서 신의 왕국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이성부는 말햇다. 파리에서라면 기차로 4시간, 자동차로 6시간은 족히 달려야 제대로된 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거의 지도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경로를 가리키는 정보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며 길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남역 4번 출구 앞 편의점에서 두 번째 골목‘,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잘 통하는 것 같다. 도시가 끊임없이 변모를 겪어 이런 식의 묘사는 금방 무용지물이 될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오작교는 분리의 상태야말로 일상적이며, 분리된 세계의 존재자가 서로 조우하거나 연결되는 일이야말로 예외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음식으로 보살피고 감응했던 한국에서 단란한 저녁 밥상은 거의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 사는 곳, 일하는 곳, 뜨는 곳이면 어디든 식당이 제일 먼저 들어섰다가 때로 봄꽃 피고 지듯 사라진다. 우리는 가족 대신 친구, 동료 등의 유사가족과 함께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동네 밥집의 텔레비전을 놓고 함께 둘러앉는다. 제일 먼저 집 밖의 식당이 필요했던 이들은 유산계급보다는 하루종일 집에 돌아갈 수 없었떤 노동자였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점심시간에 집에 돌아갈 시간이 없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이 서비스를 구매하며 ‘손님‘이 되었다.

21세기 유럽은 대규모 테마파크 건설에 열을 올리지 않는다. 파리 디즈니랜드를 제외하면 대체의 놀이공원은 지난 시절 만들어진 낡고 소박한 규모다. 이 동물원도 그랬다. 그런데 공물원 안의 작은 놀이공원에는 다소 조야한 중국식 건축물, 어린아이들이 타는 용 모양의 놀이기구가 있었다. 정원에서는 한국식 정자를 꾸며놓은 공간도 찾아볼 수 있었다. 프랑스가 상상하는 저 먼 곳, 이국적인 세계의 풍경인 셈이다. 서구가 조잡하게 상상한 아시아 세계는 이 놀이공원 안에서 상투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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