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 세기의 아이콘 현대 예술의 거장
론다 개어릭 지음, 성소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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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 샤넬의 일대기 코코샤넬 세기의 아이콘’(론다 개어릭, 을유문화사)입니다.

나는 전세계에 옷을 입혔다.’고 말한 샤넬은 매우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책임감 없는 아버지와 소녀였던 어머니는 결혼하게 되었고 이후 5남매 중의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폐병으로 일찍 죽고 아버지는 세 딸을 수녀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시설로 보내버립니다. 힘든 유년 시절을 겪은 샤넬은 어른이 되어서 끔찍했던 유년 시절을 부정하거나 아름다운 유년시절로 거짓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18세가 되어 오바진 수녀원을 나와 노트르담 기숙학교로 들어가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물론 기숙학교에서도 빈곤학생으로서 궂은 일을 하며 초라한 생활을 하지만 바느질, 재봉 기술을 배워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재봉사 자리에 취직을 하며 한 살 많은 고모 아드리엔 샤넬과 함께 생활합니다. 이 때부터 사교계에 발을 들이며 남성과 교제를 하게 되었고 라 로통드 포즈걸로도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샤넬의 신분으로는 귀족이나 신흥 부르주아와 사귈 수가 없었고 그나마 신분이 낮더라도 아름다운 여성들은 코코트(또는 이레귈리에르, 코르티잔 등등)라고 불리는 정부나 고급 창녀로서 재력가들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위 계층과의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할 시대였습니다. 샤넬 또한 코코트 역할을 때때로 이어가며 생활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샤넬은 19세기 후반 미의 기준으로 볼 때 얼굴은 예뻤지만 너무 말라서 코코트로서도 눈에 띄는 여성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에티안 발장이라는 재력가에 눈에 띄어 그의 성 샤토 르와얄리유에서 생활하다가 인생의 최고의 친구이자 애인이자 조력가라고 할 수 있는 아서 에드워드 카펠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아서 에드워드 카펠은 보이카펠로 불렸는데 샤넬의 인생은 보이 카펠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뉠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생깁니다. 카펠을 통해 샤넬은 철학과 문학, 경제, 정치, 예의범절, 교양까지 자신의 사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모든 것을 배웁니다. 카펠은 영국 귀족 출신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이었고 대단한 재산가였으며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의 공식, 비공식 외교관으로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습니다. 샤넬의 파리 1호 매장부터 도빌의 2호점, 비아리츠의 3호점을 내는 위치와 타이밍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 비용을 대주고 사업 전략을 알려주는 등등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카펠은 에티안 발장의 성에서 샤넬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성공에의 욕망과 의지, 비범한 창의력를 간파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녀의 비천한 신분을 개의치 않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훗날 샤넬은 카펠이 그녀를 낳았다고까지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둘의 결혼은 불가능했고 전쟁이 끝난 후 카펠은 적당한 신부감(다이애나)와 결혼하게 됩니다. 당시의 사회에선 돈있는 남자들은 정부情婦가 있는 것이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고 샤넬 또한 젊고 매력있고 부자인 카펠이 다른 여성들을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다른 문제여서 카펠이 결혼한 후 샤넬은 큰 충격과 실망에 빠졌고 복수심에 잠깐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카펠과 샤넬은 영혼의 동반자였기에 결혼이나 다른 제도로도 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카펠은 결혼 후에도 샤넬을 변함없이 사랑했고 만남을 자주 가졌는데 카펠의 아내인 다이애나는 그 사실을 알고 견디지 못해 영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다 1919년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날 카펠은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샤넬은 ‘1919년 잠에서 깨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던 해이자 내가 모든 것을 잃었던 해라고 당시를 회상합니다. 샤넬이 도빌 2호점의 엄청난 성공에 도취해 있을 때 전쟁은 심각해지고 있었고 이때 카펠이 프랑스 남쪽 해안인 비아리츠에 3호점을 내야할 때라고 주장해서 카펠의 도움을 받아 야심차게 오픈한 3호점은 요샛말로 초대박이 났습니다. 당시 미국의 유명 잡지들도 샤넬의 기사들을 싣느라 바빴습니다. 코르셋에서 여성들을 해방시키고 편안하고 실용적이고 심플하면서도 우아함이 살아있는 샤넬의 옷은 비싼 가격에도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이젠 샤넬의 매장은 몇 가지 옷을 구비한 모자 파는 가게가 아닌 세계 여성들의 패션을 주도하는 중심지가 된 것이죠. 카펠의 죽음 이후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있던 샤넬은 몇몇의 남자들과 만나거나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1920년 드미트리 대공을 만나 그의 외모와 신분에 반한 샤넬은 극진하게 드미트리를 대합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몰락한 러시아 왕실 출신인 드미트리 대공과 결혼하면 황후가 되어 신분 상승을 극적으로 꾀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도 없지 않았습니다. 드미트리를 만나는 동안 오컬트와 강령술, 신비주의, 신지학 같은 환상이나 미신, 부적, 상징 등에 더욱 이끌렸고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의 역사도 공부하면서 자신만의 귀족적 미학과 기호를 만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기에 훗날 샤넬의 수석 조향사가 될 에르네스트 보를 드미트리가 소개해주었고 이 때 샤넬과 보는 그 유명한 샤넬 No.5라는 향수를 개발하여 그녀를 억만장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21세기에서는 보편화된 혁신적인 제품 패키징과 신비주의 마케팅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샤넬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향수 하나의 수익만으로도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죠.

샤넬은 스스로가 샤넬이란 브랜드의 최전방 홍보 모델이었습니다. 어떻게 입으면 사람들이 멋있고 우아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향의 향수를 뿌리면 대중이 열광하고 소유하고 싶은지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고 거기에 샤넬의 심벌이 된 겹친 C자 모양의 기호가 붙은 샤넬의 제품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질 수 있고 갖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샤넬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이 겹친 C자모양의 로고는 샤넬이 옛 애인 카펠이나 드미트리 대공의 황실소품에서 일부 차용해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지만 결국 그녀가 그녀의 의도대로 그녀의 이름의 이니셜을 이용해 스스로 만든 로고이자 기호, 상징이 되었습니다. 샤넬 No.5 향수의 용기를 도안하면서 처음으로 이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샤넬의 옷과 가방, 장신구, 액세서리 등등 모든 제품에 이 신비로운 로고가 쓰였습니다.

드미트리 이후 샤넬의 인생에는 피에르 르베르디와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등 사랑을 나누었던 남성들이 등장하고 제2차 세계대전, 파시즘, 스파이 활동 등등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는데, 패션 거장이라는 예술가의 인생에 개인적인 정치성향이나 정치적인 활동이 대입되어서 평가받는 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샤넬은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반유대주의자였으며, 나치에 동조하고 협력하여 스파이로 활동했습니다. 전쟁을 기회로 삼아 사업을 확장했으며, 전후에도 순전히 직감을 따른 것처럼 가장 강력한 국가와 동맹을 맺고, 그곳의 문화에 녹아들고, 전 세계에 그 문화를 퍼뜨렸습니다. 전쟁 중 추축국을 도왔으면서도 승리를 거머쥔 연합국의 편에 서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처럼 양차 세계 대전 속 샤넬의 정치적 선택에서 엿보이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은 물론, 언제나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를 부정하고 지우려 들었던 모습, 파업하는 직원들을 전부 해고해 버리는 등 자기만의 아집에 빠져있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패션도 예술의 한 형태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패션이 의복의 개념을 넘어선 행위 예술로도 보이고, 미를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친분 있는 작가들이 그녀 생전에 전기를 쓰려고 협업도 했었지만 번번이 그녀가 마지막에 퇴짜를 놓았다고 합니다. 샤넬은 자신의 자서전이 누구에게도 쓰여지지 않도록 개인 변호사에게 규제를 만들어 달라고까지 했다는군요. 불우했던 유년기와 더불어 배우지 못한 교육에 대한 열등감이나 신비주의 등이 전기를 만들지 못하게 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샤넬은 그저 옷과 모자와 액세서리를 만든 장인이 아니라 혁신적인 패션을 통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나아가서는 여성들의 인권의식을 일깨웠고 여성들의 삶의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그녀가 평생 몸 담았던 패션이라는 예술 장르의 혁신적인 아티스트로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대중들의 평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손사레칠 것이 뻔히 보입니다.

좋은 전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P145 샤넬은 그저 옷을 입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도 발명해 내고 있었다. 여성들은 샤넬이 마법처럼 불러낸 해방 판타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샤넬의 옷을 입는 일은 샤넬을 입는 일, 코코 샤넬의 개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샤넬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곧 모두가 샤넬을 닮아 갔다. 샤넬이 사업을 시작하고 4년이 지나자 혁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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