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춤추게 하라 - 당신과 내가 함께 바꿔야 할 교육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민들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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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은>

종교성-무한히 확대되어가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이 소소한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작음’에 대한 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창조된 이래 계속된 어떤 연쇄과정 안에서 하나의 고리로서 여기에 존재한다는 ‘숙명성‘의 자각,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입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로서는 이해가 미치지 않는 어떤 연쇄의 결과로,
다름 아닌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 내가 있다는 느낌, 일종의 생명운동의 연결 말단에 내가 있고 나를 기점으로 그것이 계속된다는 느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존재의 불확정성과 확정성을 동시에 느끼는 것, 혹은 자기 존재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느끼는 것, 그것이 종교적인 체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갈등과 대립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저는 ‘영적spiritual‘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영적‘이라고 할 때 그 뜻 이 일반적인 종교인이나 종교학자가 사용하는 뜻과는 꽤 다를 거라고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있는 것, 어느 세계에도 확정적으로 귀속하지 않는 것을 인간 영성의 근원적인 규정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즉흥적인 생각이 아니라 꽤 오랜 기간에 걸친 깊은 사색으로 다다른 결론입니다.

영성교육이 있다면, 그 교육은 ‘예‘라는 규범을 형태와 신체기법으로서 먼저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종교사를 가르치는 것도, 성구나 경문을 암송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종교의례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요. 단지 감각을 연마해서 미미한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실감하는 것, 그것이 영성교육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교감할 수 있다면, 실제로 여기 이곳에 살아 있는 신체로 존재하고 만질 수도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다르더라도 아무리 미지의 존재라 하더라도 소통하지 못할 리 없다. 저는 장례에서 출발하여 이렇게 합리적인 추론으로 나아갑니다.
공자가 ‘예‘, 즉 사자와의 소통을 6예의 필두로 든 것은 그것을 모델로 해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의 영성교육도 이와 같은 이해의 바탕 위에 서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그 방향이 보이지 않을까요?

현실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현상이 넘편하고 있습니다. 카스트 교단, 초능력, 뉴에이지, 영성, 정신세계…. 대중체에도 종교적인 것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공교육이 종교적인 것들과 관계를 거부할 경우 아이들은 어떤 영적 준비도 없는 상태로 종교적인 담론에 노출됩니다.
가정에서 영적 성숙을 충분히 이룬 아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현재 도시 핵가족 가정에서 아이를 영적 성숙으로 이끄는 교육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영적·종교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당연히 그 위험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종교 현상의 홍수에 무방비 상태로 던져지는 겁니다.
교단 종교든 점술가는 모든 종교는 어쩐지 위험한 냄새가 납니다. 영적 성숙은 그 위험한 냄새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불가사의한 것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 위험을 감지하는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에서 격리된 영적 무균 상태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곳에서 키워진 아이는 처음 만난 종교적인 어떤 것 앞에서 판단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정의로 ‘영적이다‘는, 바깥과 소통하고 싶다는 지향으로 가득 찬 것에 모든 것이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경지를 향해서 그 경지를 넘으려고 하는 지향만이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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