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집 - 종묘, 경복궁, 자금성, 파르테논 신전 새롭게 보기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우물이 있는 낡은 한옥집에서 자랐다. 우리집 옆에는 붉은 벽돌 이층집이 있었고 집 뒤에는 오층 짜리 아파트가 있었다. 큰 길을 건너고 로터리를 지나면 칠팔 십 년이 넘은 목조 적산가옥들이 즐비한 길이 나왔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살았던 거리였다. 엄마 손 잡고 가끔 가는 우체국은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러시아식 건물이었다. 늘 벗어나기를 바랐는데 막상 대학을 가고 다른 도시에 살게 되었을 때, 비슷비슷한 아파트 단지와 원룸촌을 걸으며 문득문득 우리 동네가 그리웠다.


가끔 건축 에세이를 읽고, 건축물 하나 보겠다고 수천 킬로미터씩 긴 여행을 했던 건 분명 내가 자란 동네 탓도 있을 거다. 딱히 실용적이거나 편리하거나 아름다웠던 것도 아닌데 그 동네의 부조화스러운 조화로움을 오래 보고 자라서 그런지. 읽어낼 이야기가 많이 숨어있는 건축물을 보는 걸 좋아한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2년 전 이맘 때 친한 동생에게 어느 건축 전문 기자의 부음을 전해 듣고 아차 싶었다. 땅콩집의 창시자(?)로 유명한 사람이어서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해 일부러 그의 책을 읽지 않았던 터였다. 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오늘 ‘우주소년‘이라는 동네 책방에 갔다가 최근 발간된 그의 유고를 집어왔다. 머리말에 공공건축에 대한 얘기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막 뿜어져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인 종묘, 이세 신궁, 경복궁, 자금성의 건축 양식과 건축물의 구조를 꼼꼼히 설명하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장 작은 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도 재미있게 잘 쓰고 훌륭한 기자였겠지만 그 전에 따뜻한 시선을 가진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요 몇 년 사이 철학도 비전도 없이 그저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과시용 업적 쌓기로 지어진 몇몇 건축물이 자꾸 생각나서 씁쓸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얼마전 빨책 팟캐스트에서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를 다루면서 `환상의 빛`을 같이 소개했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 이 소설 원작이라며.

내가 40살 쯤에도 여전히 반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때때로 멍해진다면 이런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을 것이다. 절망과 암덩어리를 함께 키우다 간 아빠에게 수없이 말을 건네고 심장이 멈추어가는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바라보았을 오빠를 생각하며 또 곱씹고 곱씹으며. 그래서 지금은 아팠고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읽을 수는 없다. 아플 것 같아서.
비를 피해 들어간 서점에서 우연히 책을 들추어보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결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대단하다. 김중혁 작가의 말처럼 1인칭 주인공 화자의 독백이 가끔 숨막히는 것 빼고는 대체적으로 좋았다. 아니 굳이 뭐라 말하기 어려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숲 - 긴팔원숭이 박사의 밀림 모험기
김산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24] <비숲> 김산하 지음, 사이언스 북스 펴냄

통신 전파가 잡히지 않는 태백산의 산골 오지에, 전기와 수도가 없는 집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어느 스님이 수련하려고 만드신 황토 피라미드였는데 꼭대기에는 유리창문이 하늘을 향해 나 있어 별이 쏟아질 듯 비췄다. 빛은 그게 전부였다.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는 밤이었다. 계곡물소리, 제각기 높고 낮은 풀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 뜨니 아침이었다. 그 밤 이후 가끔 산골 오지에서 문명과 동떨어져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축축한 것, 더러운 것에 예민하지 않고, 혼자서도 곧잘 노는 성격이라 가능할 것도 같지만, 딱히 오지에 갈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서 금방 잊어버렸다. 스님처럼 수련을 할 것도 아니고, 스콧 니어링처럼 반문명운동을 할 것도 아니고, 제인 구달처럼 동물 연구를 할 것도 아니니.

우리나라에도 제인 구달처럼 야생 영장류를 현장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정혜윤 피디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처음 알았다. 이름도 '김산하'라고 해서, 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그가 쓴 책을 만났다. <비숲> 이름은 낯설지만, 풀이를 들어보면 '왜 이걸 못 떠올렸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하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비숲. 나는 그곳을 비숲이라 부른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난다. 한발 앞서 불어온 바람에 긴박한 소식이 실려 있다. 공백도 잠시, 작품의 서곡처럼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진다. .... 숲을 향해 물이 질주한다. 비가 탄생하고, 비가 몸을 맡기는 숲. 숲을 가능케 하고, 숲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비. 비라는 하늘과 숲이라는 땅의 맞닿음과 상호 침투. 지구상의 가장 완벽한 자연 현상.
정글, 밀림, 열대 우림. 이것이 바로 비숲이다. 나는 비숲에 살았다.
<비숲>, P.335

저자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구눙할리문쌀락 국립공원이란 데서 2007년~2009년 봄까지 살았다. 그는 자바섬에 서식하는 유인원인 자바긴팔원숭이의 먹이 찾는 행동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런 정보는 보통 책날개에 요약되어 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책날개엔 '동물을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내용밖에 없다. 휴... 책 중간 중간에 슬쩍 언급한 정보와, 출판사 인터뷰 자료를 검색해서 정리했다. 일부러 요약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진 시간들을 '요약'하기란 애초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는 그 시간을 요약하는 대신 현재로 데려왔다. 분명히 연구를 마치고 돌아와서 쓴 글일 텐데도, 그는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썼다. 그래서 침대에서 책을 읽는 내내 나도 할리문(안개)의 어둡고 축축한 비숲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잎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달려 있고 조금씩 다르게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그 움직임의 자유는 어떤 범위 안에서 벌어지도록 제한되어 있어 한 나무라는 틀 안에 모이면 통일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 곧 다가올 거센 날씨의 징조를 드러내 주는 나무의 몸동작을 보라. 굵은 가지나 기둥일수록 흔들리는 폭은 좁지만 가장 기본적인 동선을 긋는 안무를 맡고, 얇은 가지나 이파리일수록 이 동력학에 지배를 받지만 중심부가 경험하지 못하는 말단의 자유를 누리며 파르르 떤다. <비숲>, P.191

언젠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감수성을 가진 동물학자가, 책을 써서 우리에게 문장을 남겨준 것을 진정 고마워할 날이 있을 것이다. 발췌한 문장은 코끼리 다리의 떼 한 줄 만큼이나 될까. 나를 비숲으로 초대하는 문장은 페이지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길 수 없을 정도다(나는 대부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먼저 빌려 읽고, 발췌하고 싶은 문장을 워드 문서로 옮겨 치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 책을 구입한다. 이 책도 그런 이유로 구입목록에 올려놓았다.).

동물을 좋아하던 소년이 커서 동물학자가 된 것은 그럭저럭 자연스럽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동물들 중 영장류를 연구하게 된 것일까? <사생활의 천재들>에는 있지만 <비숲>에는 없는 그 비밀은 사실 이렇다. 지도교수인 최재천 교수가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영장류 연구를 저자에게 권했단다. "산하군, 자네는 큰 사이즈 영장류 연구에 맞을 것 같네."
사진으로만 봐도 저자는 상당히 사이즈가 큰 사람이다. 사실 사람이랑 제일 비슷하다는 이유로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 제일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도룡뇽이 더 좋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면 시험을 잘 본다고(!),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갔던 일본의 야생 침팬지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며(침팬지에게 침세례를 받으며 ㅠ.ㅜ) 영장류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열대우림으로 들어가 영장류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영장류 연구의 의의를 ‘인간으로서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돌아보는 의미와, 생물 다양성 감소라는 위기 속 우리의 의무를 깨닫는 의미’(P.30)에서 필요하다고 썼다. 더 풀어서는 이렇게 썼다.

영장류의 경우는 물론 인간이 그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이다. 말하자면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보다 더 흥미롭고 의미 있는 동물은 없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속한 전체적인 ‘맥락’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친척을 둔 ‘대가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그 집안의 특성과 분위기를 두루 살펴봄으로써 우리와 과연 어떤 점이 특이하고 어떤 점이 평범한지 알 수 있는 것이다. P.49

그렇게 낯설게 본 인간이라는 종은 참 못났기 짝이 없는 친척 같다. 가끔 만날 때마다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지만,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사람들처럼. 저자는 곳곳에서 인간이라는 종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같이 살되 아무 관계도 없는 것. 이것은 생물에게 낯선 개념이다. 생태계라고 하는 자연의 생활 시스템에서는 보통 여러 종이 적절한 수로 존재하고, 터전을 공유하는 다른 종과 얼마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 우리는 매 순간 동종에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동시에 그 중 절대 다수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관계’ P.207~208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는 영장류식 교육법에는 우리가 배워야 될 점이 많다. 말로는 한 가지를 가리키면서 몸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언행 불일치는 아이들의 세심한 눈에 반드시 포착된다. ... 자라나는 야생 영장류의 눈에 보이는 어른의 사는 모습은 단순 참고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머지않아 따라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가족’ P.133

다시, 원숭이 얘기로 돌아가서, 그가 연구한 긴팔원숭이는 무리 생활을 하는데, 인간의 핵가족처럼 단출하다.
엄마 아빠에 해당되는 암수 한 마리씩, 그리고 어린아이들 몇 마리 뿐이다. 언뜻 보면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무척이나 닮은 모습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작은 집단의 개체들이 꼭 혈연으로 연결된 관계는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P. 81
그는 이 원숭이들 중 네 무리를 A,B,C,D그룹으로 정하고 하루 종일 쫓아다녔는데, C그룹은 가장 험난한 지형에 서식하고 있어서 결국 추적을 포기했고, A,B,D 세 그룹을 쫓아다녔는데, 관찰이라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8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영장류는 ‘호기심’을 가진 상태에서는 계속 도망을 가지만 그 존재에 익숙해지게 되면 지루함을 느껴 굳이 도망가지 않는단다. 그리고 저자와 3명의 현지 도우미들은 험난한 비탈을 오르내리며 매일 땀과 피와 흙에 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매일 관찰, 기록을 하며 데이터를 축적했고, 그는 그렇게 사랑하던 비숲을 떠나며 또 한 번 나를 울리는 문장을 썼다.

이제 비숲으로부터 나를 거두련다. 집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남긴 엷은 흔적들일랑 대자연이 지혜롭게 지워 주리라 믿는다. ... 인간의 배우고 알고자 하는 행위에 수반된 부대현상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학문이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생명 세계 자체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되진 않는다. ... 극히 작은 과학적 보탬이고 미약한 학문적 기여이지만, 나무 사이를 넘실거리는 나의 사랑하는 벗들을 역사 속에 기록해 둘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건강한 영예로움을 느낀다. 나무 위의 그들, 땅 위의 나. 우리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은 비숲. 비가 내린다. 비가 내 얼굴을 적신다. 눈물과 비가 섞인다. 내 심장에서도. P.348

‘긴팔원숭이가 밀림에서 뭘 먹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한 대답을 언급한다. “굳이 물어봐야 한다면 당신은 어차피 알 수 없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저자에게 ‘긴팔원숭이의 일은 지구의 일이고, 지구의 일이라면 우리의 일이며, 우리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는 긴 수식은 줄여서 ‘긴팔원숭이의 일 = 나의 일’로 표현될 것이다. 어쨌건, 긴팔원숭이는 과일의 당분을 주 에너지원으로 섭취하고, 꽃과 연한 이파리를 추가해 필수 아미노산 같은 단백질을 얻으며, 가끔 곤충이나 벌레를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 겨울에 짐승들이 굶어죽지 않고 어떻게 살지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저자의 관심이 왠지 어린 시절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 같아 반가웠다. 긴팔원숭이 또한 과일이나 꽃처럼 ‘시즌’이 있는 자원을 먹고 사는데, 제철이 아닐 때는 어떻게 먹이를 얻을 것인가. 그런데 책을 아무리 읽어봐도 ‘어떻게’ 먹이를 얻는지 먹이 전략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저자가 건조한 논문 문장은 어떻게 썼을지, 그것도 무척 궁금해 학술논문서비스에서 검색해봤는데 영어였다. -.-

350쪽 가까이 되는 분량에도 소설처럼 술술 읽혔던 것은 저자의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웠기도 하지만, 이야깃거리를 놓고 필요한 지식을 곁들여 설명하는 서술 방식 덕분이기도 했다. 곁들여 설명한 것 중 나의 무식을 깨닫게 해준 구절이다.

유인원 드림팀에서 가장 잘 알려진 침팬지와 고릴라는 아프리카 동물이다. 긴팔원숭이는 오랑우탄과 함께 아시아에만 사는 아시아의 유인원이다. P.17~19
영장류 연구의 역사는 유구하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연구자는 루이스 리키 박사가 파견한 여성 삼총사이다. 침팬지는 제인 구달, 고릴라는 다이앤 포시, 오랑우탄은 비루테 갈디카스가 맡아 처음으로 장기간에 걸친 행동 생태학 연구를 감행하였다. P.30

루이스 리키라면 진잔트로푸스보이세이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찾아낸 케냐의 혼을 받은 영국의 인류학자? 그런데 제인 구달이 그의 제자였다니. 그리고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을 영장류 한 종씩 짝지어 파견을 했다니. 왜 나만 몰랐지?? 그런데 또 검색하다보니 다이앤 포시는 르완다에서 고릴라를 연구하면서 밀렵꾼들과 갈등을 빚다 1985년 살해되었다고 한다. 정혜윤 PD의 책을 다시 들춰보니 <안개 속의 고릴라> 서문과 함께 다이앤 포시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정보가 있어도 알아봐야 정보인 거지.

아, 엄청 긴 글이 되었다. 사실 하고 싶은,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지만 독후감은 간단한 스케치라고 생각하며 시작하는데, 간단하지가 않다. 암튼, 이번 주말엔 <비숲> 덕분에 아주아주 행복했고, 다시 한 번 과학자의 문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떤 동물학자의 문장은, 시인의 문장보다 더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숲 - 긴팔원숭이 박사의 밀림 모험기
김산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24] <비숲> 김산하 지음, 사이언스 북스 펴냄

통신 전파가 잡히지 않는 태백산의 산골 오지에, 전기와 수도가 없는 집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어느 스님이 수련하려고 만드신 황토 피라미드였는데 꼭대기에는 유리창문이 하늘을 향해 나 있어 별이 쏟아질 듯 비췄다. 빛은 그게 전부였다.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는 밤이었다. 계곡물소리, 제각기 높고 낮은 풀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 뜨니 아침이었다. 그 밤 이후 가끔 산골 오지에서 문명과 동떨어져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축축한 것, 더러운 것에 예민하지 않고, 혼자서도 곧잘 노는 성격이라 가능할 것도 같지만, 딱히 오지에 갈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서 금방 잊어버렸다. 스님처럼 수련을 할 것도 아니고, 스콧 니어링처럼 반문명운동을 할 것도 아니고, 제인 구달처럼 동물 연구를 할 것도 아니니.

우리나라에도 제인 구달처럼 야생 영장류를 현장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정혜윤 피디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처음 알았다. 이름도 '김산하'라고 해서, 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그가 쓴 책을 만났다. <비숲> 이름은 낯설지만, 풀이를 들어보면 '왜 이걸 못 떠올렸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하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비숲. 나는 그곳을 비숲이라 부른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난다. 한발 앞서 불어온 바람에 긴박한 소식이 실려 있다. 공백도 잠시, 작품의 서곡처럼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진다. .... 숲을 향해 물이 질주한다. 비가 탄생하고, 비가 몸을 맡기는 숲. 숲을 가능케 하고, 숲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비. 비라는 하늘과 숲이라는 땅의 맞닿음과 상호 침투. 지구상의 가장 완벽한 자연 현상.
정글, 밀림, 열대 우림. 이것이 바로 비숲이다. 나는 비숲에 살았다.
<비숲>, P.335

저자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구눙할리문쌀락 국립공원이란 데서 2007년~2009년 봄까지 살았다. 그는 자바섬에 서식하는 유인원인 자바긴팔원숭이의 먹이 찾는 행동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런 정보는 보통 책날개에 요약되어 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책날개엔 '동물을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내용밖에 없다. 휴... 책 중간 중간에 슬쩍 언급한 정보와, 출판사 인터뷰 자료를 검색해서 정리했다. 일부러 요약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진 시간들을 '요약'하기란 애초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는 그 시간을 요약하는 대신 현재로 데려왔다. 분명히 연구를 마치고 돌아와서 쓴 글일 텐데도, 그는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썼다. 그래서 침대에서 책을 읽는 내내 나도 할리문(안개)의 어둡고 축축한 비숲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잎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달려 있고 조금씩 다르게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그 움직임의 자유는 어떤 범위 안에서 벌어지도록 제한되어 있어 한 나무라는 틀 안에 모이면 통일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 곧 다가올 거센 날씨의 징조를 드러내 주는 나무의 몸동작을 보라. 굵은 가지나 기둥일수록 흔들리는 폭은 좁지만 가장 기본적인 동선을 긋는 안무를 맡고, 얇은 가지나 이파리일수록 이 동력학에 지배를 받지만 중심부가 경험하지 못하는 말단의 자유를 누리며 파르르 떤다. <비숲>, P.191

언젠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감수성을 가진 동물학자가, 책을 써서 우리에게 문장을 남겨준 것을 진정 고마워할 날이 있을 것이다. 발췌한 문장은 코끼리 다리의 떼 한 줄 만큼이나 될까. 나를 비숲으로 초대하는 문장은 페이지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길 수 없을 정도다(나는 대부분의 책을 도서관에서 먼저 빌려 읽고, 발췌하고 싶은 문장을 워드 문서로 옮겨 치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 책을 구입한다. 이 책도 그런 이유로 구입목록에 올려놓았다.).

동물을 좋아하던 소년이 커서 동물학자가 된 것은 그럭저럭 자연스럽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동물들 중 영장류를 연구하게 된 것일까? <사생활의 천재들>에는 있지만 <비숲>에는 없는 그 비밀은 사실 이렇다. 지도교수인 최재천 교수가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영장류 연구를 저자에게 권했단다. "산하군, 자네는 큰 사이즈 영장류 연구에 맞을 것 같네."
사진으로만 봐도 저자는 상당히 사이즈가 큰 사람이다. 사실 사람이랑 제일 비슷하다는 이유로 침팬지 같은 영장류에 제일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도룡뇽이 더 좋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면 시험을 잘 본다고(!),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갔던 일본의 야생 침팬지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며(침팬지에게 침세례를 받으며 ㅠ.ㅜ) 영장류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열대우림으로 들어가 영장류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영장류 연구의 의의를 ‘인간으로서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돌아보는 의미와, 생물 다양성 감소라는 위기 속 우리의 의무를 깨닫는 의미’(P.30)에서 필요하다고 썼다. 더 풀어서는 이렇게 썼다.

영장류의 경우는 물론 인간이 그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이다. 말하자면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보다 더 흥미롭고 의미 있는 동물은 없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속한 전체적인 ‘맥락’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친척을 둔 ‘대가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그 집안의 특성과 분위기를 두루 살펴봄으로써 우리와 과연 어떤 점이 특이하고 어떤 점이 평범한지 알 수 있는 것이다. P.49

그렇게 낯설게 본 인간이라는 종은 참 못났기 짝이 없는 친척 같다. 가끔 만날 때마다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지만,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사람들처럼. 저자는 곳곳에서 인간이라는 종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같이 살되 아무 관계도 없는 것. 이것은 생물에게 낯선 개념이다. 생태계라고 하는 자연의 생활 시스템에서는 보통 여러 종이 적절한 수로 존재하고, 터전을 공유하는 다른 종과 얼마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 우리는 매 순간 동종에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동시에 그 중 절대 다수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관계’ P.207~208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는 영장류식 교육법에는 우리가 배워야 될 점이 많다. 말로는 한 가지를 가리키면서 몸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언행 불일치는 아이들의 세심한 눈에 반드시 포착된다. ... 자라나는 야생 영장류의 눈에 보이는 어른의 사는 모습은 단순 참고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머지않아 따라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가족’ P.133

다시, 원숭이 얘기로 돌아가서, 그가 연구한 긴팔원숭이는 무리 생활을 하는데, 인간의 핵가족처럼 단출하다.
엄마 아빠에 해당되는 암수 한 마리씩, 그리고 어린아이들 몇 마리 뿐이다. 언뜻 보면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무척이나 닮은 모습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작은 집단의 개체들이 꼭 혈연으로 연결된 관계는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P. 81
그는 이 원숭이들 중 네 무리를 A,B,C,D그룹으로 정하고 하루 종일 쫓아다녔는데, C그룹은 가장 험난한 지형에 서식하고 있어서 결국 추적을 포기했고, A,B,D 세 그룹을 쫓아다녔는데, 관찰이라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8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영장류는 ‘호기심’을 가진 상태에서는 계속 도망을 가지만 그 존재에 익숙해지게 되면 지루함을 느껴 굳이 도망가지 않는단다. 그리고 저자와 3명의 현지 도우미들은 험난한 비탈을 오르내리며 매일 땀과 피와 흙에 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매일 관찰, 기록을 하며 데이터를 축적했고, 그는 그렇게 사랑하던 비숲을 떠나며 또 한 번 나를 울리는 문장을 썼다.

이제 비숲으로부터 나를 거두련다. 집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남긴 엷은 흔적들일랑 대자연이 지혜롭게 지워 주리라 믿는다. ... 인간의 배우고 알고자 하는 행위에 수반된 부대현상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학문이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생명 세계 자체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되진 않는다. ... 극히 작은 과학적 보탬이고 미약한 학문적 기여이지만, 나무 사이를 넘실거리는 나의 사랑하는 벗들을 역사 속에 기록해 둘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건강한 영예로움을 느낀다. 나무 위의 그들, 땅 위의 나. 우리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은 비숲. 비가 내린다. 비가 내 얼굴을 적신다. 눈물과 비가 섞인다. 내 심장에서도. P.348

‘긴팔원숭이가 밀림에서 뭘 먹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한 대답을 언급한다. “굳이 물어봐야 한다면 당신은 어차피 알 수 없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저자에게 ‘긴팔원숭이의 일은 지구의 일이고, 지구의 일이라면 우리의 일이며, 우리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는 긴 수식은 줄여서 ‘긴팔원숭이의 일 = 나의 일’로 표현될 것이다. 어쨌건, 긴팔원숭이는 과일의 당분을 주 에너지원으로 섭취하고, 꽃과 연한 이파리를 추가해 필수 아미노산 같은 단백질을 얻으며, 가끔 곤충이나 벌레를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 겨울에 짐승들이 굶어죽지 않고 어떻게 살지 걱정했던 기억이 있다. 저자의 관심이 왠지 어린 시절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 같아 반가웠다. 긴팔원숭이 또한 과일이나 꽃처럼 ‘시즌’이 있는 자원을 먹고 사는데, 제철이 아닐 때는 어떻게 먹이를 얻을 것인가. 그런데 책을 아무리 읽어봐도 ‘어떻게’ 먹이를 얻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내일 학술논문서비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을 해봐야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저자가 건조한 논문 문장은 어떻게 썼을지, 그것도 무척 궁금하다.

350쪽 가까이 되는 분량에도 소설처럼 술술 읽혔던 것은 저자의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웠기도 하지만, 이야깃거리를 놓고 필요한 지식을 곁들여 설명하는 서술 방식 덕분이기도 했다. 곁들여 설명한 것 중 나의 무식을 깨닫게 해준 구절이다.

유인원 드림팀에서 가장 잘 알려진 침팬지와 고릴라는 아프리카 동물이다. 긴팔원숭이는 오랑우탄과 함께 아시아에만 사는 아시아의 유인원이다. P.17~19
영장류 연구의 역사는 유구하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연구자는 루이스 리키 박사가 파견한 여성 삼총사이다. 침팬지는 제인 구달, 고릴라는 다이앤 포시, 오랑우탄은 비루테 갈디카스가 맡아 처음으로 장기간에 걸친 행동 생태학 연구를 감행하였다. P.30

루이스 리키라면 진잔트로푸스보이세이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찾아낸 케냐의 혼을 받은 영국의 인류학자? 그런데 제인 구달이 그의 제자였다니. 그리고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을 영장류 한 종씩 짝지어 파견을 했다니. 왜 나만 몰랐지?? 그런데 또 검색하다보니 다이앤 포시는 르완다에서 고릴라를 연구하면서 밀렵꾼들과 갈등을 빚다 1985년 살해되었다고 한다. 정혜윤 PD의 책을 다시 들춰보니 <안개 속의 고릴라> 서문과 함께 다이앤 포시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정보가 있어도 알아봐야 정보인 거지.

아, 엄청 긴 글이 되었다. 사실 하고 싶은,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지만 독후감은 간단한 스케치라고 생각하며 시작하는데, 간단하지가 않다. 암튼, 이번 주말엔 <비숲> 덕분에 아주아주 행복했고, 다시 한 번 과학자의 문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떤 과학자의 문장은, 시인의 문장보다 더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생 멸종 진화 - 생명 탄생의 24가지 결정적 장면
이정모 지음 / 나무나무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이런 걸 주제 과학사라고 해야 하나? 생명 탄생의 24가지 결정적 장면을 꼽아 생명의 역사와 그 끄트머리에 살짝 등장하는 인류의 역사를 들려준다.

<진화론 산책>이 과학자와 그 발견들을 중심으로 한 교과서 같다면 이 책은 각 발견들에서 중요한 포인트만 집어내어 자세하게 풀어 쓴 참고서 같은 느낌. <진화론 산책>을 읽고 들었던 의문들이 꽤 많이 해결되었고,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여져서 그런지 뭔 뜻인지 읽고 바로바로 눈에 들어오는 게 참 좋았다. 과학에 관심 많은 중학생 정도부터는 읽어도 되지 않을까. 나같은 문과형 인간이 과학에 대한 관심에 첫 발을 떼기에도 좋다.

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말씀 드리자면 조나단 스위프트가 소인국과 거인국을 오가며 본 인간들 묘사할 때 개체 크기가 커지는데 형태 변화를 안 시켰다고 막 구박하셨는데... 문과들은 그런 생각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요... 그냥 상상력이라고 해주심 안될까요?? 물론 .. 수학적인 척 하면서 먹는 양 계산하고 그런 게 못마땅했을 순 있겠지만.. 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