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노자 석가
모로하시 데츠지 지음, 심우성 옮김 / 동아시아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일본의 한학자 모로하시 데츠지가 100세에 쓴 책이다. 모로하시 데츠지는 한학(漢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대한화사전 大漢和辭典』을 펴낸 세계적인 한학자이다. 그런 그가 100세에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기대되는 일이다.

또 특이한 점은, 부제인 '세 성인의 회담 三聖會談'이 뜻하듯 공자·노자·석가 세 사람이 모여 대화하는 형식으로 씌여진 책이라는 것이다. 대개 이런 류의 책은 별볼일 없게 마련이지만 저자가 저자니만큼 만만한 책은 아닐 듯싶었다. '한권으로 충분한 동양사상 이야기'라는 식의 과장된 카피나, 촌스러운 표지 그림도 눈에 거슬렸지만 참았다.

그러나 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실망이었다.

이 책은 공자, 노자, 석가가 저자(와 그의 학생)와 만나 서로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사람의 인간관, 생사관 등을 비교하고 이어서 세 사람의 주요 사상(공, 무, 천, 중도, 중용, 무위 등등)에 대해 논의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게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유가, 도가, 불가 사상의 개론서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특별히 독창적이랄 해석도 없고 깊이 있는 해설도 별로 없다.

회담록의 형식을 빌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치를 특별히 높여주지도 못한다. 세 사람의 회담록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사상을 논설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말할 때, 다른 두 사람은 딱히 대화의 상대가 되지는 않고 간간이 맞장구나 칠 뿐이다. 그런 깊은 뜻이! 오오 그렇군요! 하면서.

결국 회담의 형식을 빌린 것은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읽게 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세 사람의 대화 어디에서도, 가령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볼 수 있는 긴장감은 없다. 물론 때로는 서로간의 의견이 부딪칠 때도 있다. 가령 정치관에 있어서 공자의 유위(有爲, 그가 이런 말을 쓰지는 않지만)와 노자의 무위(無爲)는 서로 부딪치는 부분이며,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이 책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본격적인 논쟁은 늘 어물어물 피해간다. 이런 것이 무슨 대화란 말이냐.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린가?' 하는 생각이 반복해서 일어날 정도로 현실과는 거리가 먼 듯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이는 동양철학 전반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현실과 동떨어져서 알 수 없는 교설만 반복하는 동양철학의 풍토가 이 책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런 성격은 책의 첫머리에 저자가 회담을 준비하는 대목에서부터 이미 나타난다. 저자는 이 회담이 '매우 고상한 회담'이므로 장소를 높은 산으로 정해야 한다고 한다. 공자, 노자, 석가의 사상이 그리도 '고상한' 사상이란 말인가? 세 사람의 사상은 고통과 폭력과 번뇌로 가득한 인간 세계의 현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그려진 공자, 노자, 석가는 '성인'이란 칭호를 받으며 높은 산 위에 한가하게 앉아 점잖게 교설이나 늘어놓는 노인네들이다. 이것이 세 사람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들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인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동양철학의 두 가지 중요한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한 가지는 철저하지 못하고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저 '다 좋은 얘기'로 끝나는 철학은 아무 의미가 없다. 스스로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근원부터 철저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상과 대화할 때는 그야말로 솔직하게 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대화를 해야 한다. 이도 좋고 저도 좋다는 식의 대화만을 반복한다면, 대화를 통한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비현실성이다. 추상적인 가치들, 인이니 도니 하는 것의 개념 풀이만 반복하는 철학과 윤리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우리가 직접 맞부딪쳐 싸우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철학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동양철학은 이제 실없는 교양교과의 수준을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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