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프랑스를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 시의 첫 구절이다. 1967년 일본에서 태어나 외교관이던 아버지 덕분에 여러 국가를 돌며 유년기를 보낸 노통브는 그 독특한 이력과 못 말리는 독서량으로, 저만의 독특한 문체를 뽐내며 그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다.

1995년 발표되어 파리 프르미에르 상을 작가에게 안긴 이 소설은 한 편의 사랑스러운 동화를 읽는 듯 부드럽고 온화한 문체 속에 노통브만의 박학과 철학적 깊이를 녹여내어 독자들을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직을 은퇴한 후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그의 영혼의 반쪽, 사랑하는 아내 쥘리에트와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픈 에밀에게 <우리집>의 발견은 하늘의 축복과도 같다. 오후 네 시, 이웃집 노신사 베르나르뎅 씨가 그들의 집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후 네 시면 어김없이 찾아와 여섯 시까지 어느새 그의 전용 의자가 되어버린 소파에서 두 시간을 ‘죽치다’ 사라지는, 무례함을 넘어서 해괴하기까지 한 이 방문객은 평화롭고 완벽하게만 보이던 노부부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차 주인공의 삶을 갈아먹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작은 새가 지저귀듯 사랑스러운 동화로 시작됐던 이 소설은 어느새 한여름 더위를 날려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공포소설로 돌변하여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다분히 노통브스러운(?) 이 소설은 베르나르뎅 씨로 점철되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65년을 예의로 무장하고 살아온 사람이 한순간에 자신의 가치관과 존재방식에 의문을 품게 되고, 사건의 또 다른 뜨거운 감자인 베르나르뎅의 아내 베르나데트의 등장과 함께 예기치 못한 곳으로 이야기가 옮겨가는 과정을 시종일관 노래하듯 편안하고 새털처럼 가벼운 문체로 그려낸다.

평생 스스로에 대한 일말의 의심 없이 평탄한 삶을 영위해 오던 주인공이 오후 네 시의 방문객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딱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짜증스런 방문에 주인공은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가며 불안을 증폭시키고 스스로 외부와의 벽을 만들어 자신을 옭아맨다. 그리하여 그 불합리하고 불편한 진실은 자연스럽게 잠 못 이루는 나날로 이어지고, 마치 정신분열이라도 일으키듯 자신도 몰랐던 자아의 표현, 혹은 광기 어린 분출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철학적 명제가 가득한 소설, 오후 네 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저 오후 네 시의 방문객과 같은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내가 아닌 타인의 눈으로 응시할 용기가 서지 않아 그저 외면하고 있을 따름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우연히 현관문을 두드리는 퉁퉁하고 낯선 남자의 노크소리를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똑똑……. 쉿! 누가 온 것 같군요.

문을 열어주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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