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안티고네 > 지위지향성의 나라와 목표지향성의 나라
일본 근대화론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20
라이샤워 지음 / 소화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일본 근대화와 관련된 라이샤워의 논문이나 인터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글은 2장에 나오는 「19세기의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이다. 제목 그대로 이 글은 19세기에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일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이다.

라이샤워의 분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중국의 지위지향성과 일본의 목표지향성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지위지향성의 경향을 갖고 있으며, 중국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 실패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중대한 병리현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샤워는 19세기 후반의 중국에서는 관계(官界)에서의 높은 지위를 추구한 유능한 지도자들의 예를 끝도 없이 들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정부 밖에서 목적을 달성하는데 만족하는 지도자들의 수가 많으며, 어떤 사람은 실로 전도가 유망한 관직을 사양하면서까지 목적하는 바를 추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어디까지나 메이지 정부 밖에서 일본 최초의 근대적 교육자로서의 지위를 구축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부케(武家)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상인을 길을 택해 해운왕으로서 명성을 떨친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메이지 정부의 관리가 되어 전도유망한 정치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가 일개 사업가로서 더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결심하고 근대 실업의 지도자로서 일본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한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 등을 들 수 있다.

랴이샤워에 의하면, 이렇듯 관료로서 권력을 차지할 것을 피하고 다른 형태로 공헌을 하려 했던 인물을 19세기 중국사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청말 산업 개발에 큰 힘이 되었던 솅쉔화이(盛宣懷) 같은 인물은, 관리의 지위에 집착하여 자신의 기업을 정치적 야심에 예속시킴으로써, 오히려 중국 근대화를 저해하는 결과마저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19세기까지 갈 것도 없을 것 같다. 멀쩡한 기업체를 정계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대통령에 출마하는 재벌 총수, 공천만 시켜주면 언제든 금배지를 위해 모든 것을 팽개칠 각오가 되어 있는 대학교수들, 킹 메이커를 지향하며 언론권력을 휘두르는 족벌 언론사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사회의 주류로서 지도층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다양성과 전문성보다는, 권력을 향해 “앞으로나란히”를 하고 있는 일원적이고 획일적인 우리 사회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우리 역사가 완전한 봉건제를 경험하지 못한 것을 탄식만 할 것인가?

라이샤워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고찰할 때, 사회구조나 가치관이나 윤리관 등의 요소가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더욱 그 중요성이 천연자원이나 외부의 원조 등 물리적 요인들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라이샤워 같은 거물급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어 시선을 묶은 일본의 위상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에는 왜 라이샤워 같은 한국사 연구자가 없을까? 서양의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 연구자들 중 한국학 연구자들이 가장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곳곳에 나오는 거북한 일본어투 문장, 이것이 별 다섯을 줄 수 없는 이유이다. 번역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한국어 표현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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