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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평점 :
나는 재일조선인 2세로 전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날마다 일에만 매달렸던 세대다. 연주자가 되든 감상자가 되든 클래식음악과 자연스레 친숙해지려면 그 나름의 조건이 필요하다.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고 또 어느 정도의 문화적 축적도 필요한 것이다. 부모와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 클래식음악에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고, 자택에 오디오 세트가 있거나, 가끔 콘서트에 간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다른 재일조선인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집에는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나의 두 형은 군사정권 시절 오랜 감옥생활을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어렸을 적에 첼로라도 좀 배우게 해 주었더라면!"
교도소 소내방송을 통해 가끔 베토벤을 접한 그는 음악에 대한 애타는 갈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어떤 악기든 연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옥중에서 첼로 연습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 대신 아코디언을 넣어달라고 했다.
그 형의 탄식이 어떤 것인지 나도 잘 안다. 어머니가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해 주었더라면.... 하지만 재일조선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그런 형이 됐지 만일 양친이 첼로를 배우게 하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고 교양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란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런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케이스 속의 아름다운 악기를 잠시라도 만져보고 싶다, 무슨 소리가 날지 내 손으로 켜보고 싶다, 그 악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한테 더 다가가고 싶다, 그런 애타는 동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클래식음악을 즐길 수 없고, 악기를 구입하거나 어릴 적부터 전문가에게 배우고 음악학교에 진학해서 해외유학을 가기도 하는, 음악가가 되기 위한 문화적 투자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산층의 세계와 클래식음악의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죽이 잘 맞는다. 중산층의 계급성을 부정하는 건 클래식음악에 대한 동경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께부꾸로에 있던 '콘서트홀'이라는 음악다방에 다닌 것은 내 은밀한 낙이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부르주아적 생활을 동경하는지, 음악 그 자체를 동경하는지 나 자신도 잘 몰랐다. 전자는 결연히 부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후자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부정하면서 동경하고 동경하면서 부정했다.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소심하고 경계심이 강한 나는 윤이상이라는 예술가에게로 기울어진 내 마음을 타께다 양이나 F가 이해해줄지 자신이 없었다. 음악에 관한 전문지식이 있고 나 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더 자주 좋은 음악을 접해온 그들이 윤이상 음악에 대해 "따분하다"거나, "결국 민족음악이군"이라거나, "정치의식은 참을 수 있지만 예술적으로는 아류다"라거나 하는 평가를 내리면 어떻게 응답해야 한단 말인가.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음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감성에 달려 있다. 그들이 평가하지 않더라도 내가 좋다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내 흉중에 맺혀 있었다.
그걸 제대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분단민족의 일원, 군사독재국가의 국민, 정치범 가족,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조건에 의해 규정된 내 음악적 감성의 보편성이 시험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윤이상이 '아류'라면, 거기에 경도당한 나 자신도 아류라는 의미가 아닌가. 나는 나를 구속하는 개별적인 존재조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지만, 윤이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 존재 구속성과의 치열한 갈등을 통해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 바람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년에 난생 처음으로 클래식에 입문하겠다는 마음으로 박종호 선생님이 쓰신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시리즈를 읽었다. 해박한 지식과 심도 있는 감상을 쉬운 문장에 담아 전달하는 매끄러운 글솜씨에 즐겁게 읽기는 했지만, 이 분은 나랑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확실히 나는 중산계급 이상의 가정에서, 클래식 정도는 무리 없이 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고 내 아버지도 클래식 앨범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기는 하였지만, 아버지도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 건지, 이런 연주와 저런 연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 작곡가와 저 작곡가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따위의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수준의 식견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떻게 하다보니 어릴 때 피아노, 바이올린, 플룻 세 악기를 섭렵했지만 실력이 일정 궤도에 이르기 전에 모두 연습의 지겨움에 항복해버렸기 때문에 지금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오히려 한창 가요만 듣던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로부터 "교양인이라면 이승환도 좋지만 클래식 좀 들어라"라는 충고를 듣고 삐딱선을 타서 지배계급이 향유하는 문화자본 따위에 내가 관심이나 갖나 봐라...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더랬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거의 버렸고, 클래식음악을 듣는 감동이 어떤 건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클래식 공연을 즐기는 것이 상당한 돈을 필요로 하는 일인 건 틀림없는 사실인지라 취미로 삼기에 여전히 재정적 부담을 느끼기는 한다. 비싼 티켓을 한번씩 지르고 나면, 밥 한끼 먹기 힘든 사람도 많은데 이렇게 호사를 누리며 살아도 괜찮은 건지 조금씩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 한편으론, 좋아서 듣기는 듣는데, 과연 내가 감동을 받을 지점을 제대로 알고 느끼는 건지, 이 연주와 저 연주 중에 어떤 게 더 좋다는 내 판단에는 근거가 있기는 한 건지, 하는 입문자의 열등감 같은 것이 있다. 그런,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감정 같은 거,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빠졌던 박종호 선생님 같은 분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서경식 교수 봐라. 바이올린 들고 가는 여자애한테 돌 던지고 싶었댄다. 그러면서도 그 바이올린 한번 켜 보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부정하고 동경하고 동경하고 부정하고.. 이런 이율배반적 감정이 내가 갖고 있던 감정과 반드시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서경식 교수가 내 글을 본다면, 당신은 그냥 음악을 이해 못하는 무식한 부르주아였을 뿐이지 않소... 라는 반응을 보일테고, 사실은 그 편이 더 정확하긴 하다), 이게 내게 맞는 옷인지 반신반의하는 그런 마음으로 지내온 세월이 있었다는 게, 참 반가웠다.
서경식 교수가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건, 한국에서 정치범으로 감옥에 가게 된 두 형의 구명 운동을 하며 아버지의 공장을 도우던, 제3자의 시각에서 봤을 땐 '백수'이던 시절 오며가며 구경하던 동네의 아마추어 연주단의 단원들과 교류를 하면서였다고 한다(그 단원 중 한 여성 - 글에서는 'F'라고 지칭되는- 과 나중엔 결혼도 하게 된다). 지휘자는 여성속옷 생산업체의 직원이었고, 콘트라베이스 주자는 두부가게의 주인이었으며, 첼로 주자 중 한명은 지게차 운전사였다. 그렇게 빠듯하게 먹고 살아가는 틈틈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케스트라를 지켜가고 있던 거다. 이들과 만나 자주 대화를 하며 클래식음악에 대해 배워갈 무렵,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중산계급의 세계와 클래식음악의 세계는 죽이 잘 맞는다. 하지만 양자를 등식으로 묶을 순 없다. 예컨대 모짜르트는 궁정과 귀족의 비호를 받았기에 수많은 명작을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 곡들은 귀족사회의 가치관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음악은 어쩐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이렇게 음악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동경과, 음악이 창조하는 보편적인 감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의 위험함에 대한 언급도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나치가 음악이 만들어내는 도취의 감정을 어떻게 정치 선전에 이용했는지, 아우슈비츠에서 수인들의 오케스트라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에 관한 글들을 읽다 보면 바그너의 음악을,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이 지휘한 음악을 어떤 감정으로 들어야할지 참 난감해지기도 한다. 역시, 쉽지는 않다 클래식..
스스로 에필로그에서도 밝혔다시피, 이처럼 서경식 교수가 이 책에 쓴 글들은 음악비평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 감상자가 '음악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다. 10년 전부터 매년 부인과 함께 들리는 잘츠부르크 음악제 등에서 본 오페라나 교향악단의 연주에 대한 이런 저런 품평들에도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글들에서 음악은 음악 그 자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단했던 삶의 어떤 지점에 대한 회고와 얽혀있거나, 그가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세상일들에 얽혀 있어, 많은 경우 그가 얘기하고 있는 그 음악이 어떤 건지 들어본 적이 없어 전혀 알 수 없더라도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서나,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는 무리없이 이해하고,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체류하면서 처음 클래식 연주회 티켓을 예매했는데, 공연장소가 '예술의 전당'이라는 안내를 받고 한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 설마 그런 직설적인 표현이 공연장소의 이름일까 싶어서 - 에피소드 같은 것도 재미있었다. 앞으로도 다시 여러 번 뒤적이게 될 것 같은 책이다. 30대에 썼다는 짝궁같은 책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도 곧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