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민은 왜 그렇게 잔혹했을까? 지금의 도덕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내면의 잔혹성을 끄집어내 합리화해 줄 제도만 있다면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해질 수 있는 모순적인 존재다. 

동물에 대한 집단적 조직적 착취는 문명의 발전이 가속화하는 시점에 출현하였다. 우리는 쉽게 오해하지만, 인간에 의한 동물의 멸종은 근래에 시작된 사건이 아니다. 2,000년 전 로마에도 있었다. 그리고 종을착취한 뒤 멸종시키는 문명의 추악함은 원형경기장에서 "죽여! 죽여!"를 소리치던 평범한 시민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었다.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한 생명을 끝장내고 손으로 직접 살점을만지면서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이 다른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 고기를 입안에 넣음으로써 카리부의 생명을 자기가 잇게 된다는 것‘

아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한 생명을 통해 다른 한 생명이 살아간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사냥의 성공으로 얻은 성취감과 동시에 시뻘건 피를 보면서 드는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았
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인류가 동물에 대해 느꼈던 감정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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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사소함이 쌓이면 삶이 풍성해진다. 정신없는일상에 즉석밥 하나 돌려 먹더라도 미리 만들어둔 사소함 몇개를 꺼내 상을 차리면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사소함 없이 삶의 거대한 담론들이 무슨 소용일까. 밥상을 차리는 일은 사소한 일로 치부되어 특정한 사람들의 노동에 기대어 너무 당연시되어 왔다. 나는 그 영역을 저임금 노동이나 헌신적인 어머니와 이모님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세상이 싫다.
음식을 하는 일, 밥상을 내는 일, 그걸 내 입과 다른 이의 입에넣어 삶을 유지시키는 행위는 인간의 자아실현 영역에 속한다. 

서로의 삶에 관여 않고 말끔히 일만 하는 관계를 희망하는 것.
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먹지 않는 일은 타인의 고민이 되고,
대충 때우는 일은 모두의 걱정을 산다. 연대는 결국 서로의삶에 참견하는 일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끼어드는 일이다. 밥상을 차리고 나누는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서로에게 관여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 밥을 먹는 행위일 것이다. 식재료를 준비하고 지지고 볶아 그릇에 담아 한 상으로 내기까지, 정교하게 분업화된노동이 필요했다.
자기 몫의 생존만 고민해서는 지금의 사회가 만들어질수 없었을 것이다. 대규모로 농사를 짓고, 추수하고 탈곡하는 과정은 자신의 텃밭에서 나고 자란 것을 먹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행위로 여러 사람을 먹일 만큼의 양식을 생산한다. 그럴싸한 건물을 세우고, 정치를 하며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노동의 여력은 자기 몫이 아닌 ‘우리‘ 몫을 고민한 인간의연대로 마련된 것이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이 서로의 노동을 맞대어 협업으로 한 상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차려진한 상을 먹는 일은 공동체적 의식이다. 

부끄럽다가, 위로받는다.
어젯밤 나는 우리 삶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을 떨쳐낼수 없었다. 꾸역꾸역 내 집 마련하겠다며 아등바등하다 인생을 다 허비해버리는 우리 인생이 불쌍했다. 사는 게 그냥 사는거지 꼭 내 것이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이 갈등과 야만의 세상이 싫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살아야 100년을 산다는데 그 인생의 대부분을 이번민에 쏟으며 불안해하는 것이 안쓰럽다고생각했다. 집을 구입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며, ‘막차 타기‘라던데 이 미친 세상에서 막차를 탔다 한들 다음은 또 자식 걱정에 부모 걱정까지, 아무튼 온갖 걱정거리 모두 이고 살며 끝나지 않는 계산을 하느라 애꿎은 머리만 쉼 없이 굴리는 부질없는 시간의 소모가 아까웠다. 나는 내가 불쌍했다.
그러고 나서 맞은 첫 끼가 이 만두이고 이 수제비여서좋았다.

여전히 이 도시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무한 갈등의 시대라 하고 모두가 부동산에 미친 것 같지만, 목소리 없는 사람들은 담담히 자기 일을 하며 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경쟁이 끝나기를가만가만 기도하고 있다. 공해 같은 온갖 정책과 구호가 담아내지 못하고 통계로 겨우 보일락말락 하는 그 목소리들. 딱 그만큼의 사람들이 이렇게 만두를 빚는다. 이렇게 고명을 만들어둔다. 이렇게 육수를 끓인다. 부질없고 하릴없는 숫자의 세계가 아닌 맛과 멋 실존의 세계에서 결코 떠남 없이 맨바닥에몸을 착 붙여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이의 노동.
용기를 내어 살자.

한국의 근현대사를 두고 압축적으로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고들 말한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도 너무 많다.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적산가옥들이 비명한 번 못 지르고 사라졌다. 자랑할 만한 유산이 될 수 있었던 숱한 가능성들이 개발
논리에 사라졌다. 어디건물만 사라졌을까. 공간이 사라지며 사람도 지워졌다. 문화도 지워졌고 함께 생존해야 한다는 연대 의식 또한 철거당했다.
거대한 도시와 그 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쉼없이 돌아가는 노동의 굴레, 그 굴레가 우리 삶을 집어삼킬 것처럼 굴 때도 든든하게 인간의 곁을 지켜준 것은 정성껏 준비한 한 그릇의 음식이었다. 그 시절 내 윗세대의 허기짐과 맛있는 한 끼의 갈망을 충족시켜준 가게들은 세월의 풍파를 거뜬히 견디고40, 50년 업력의 노포가 되었다. 내게 있어 그 노포들의 존재는 지난 수십 년간 너무 쉽게 쫓아내고 지워버린 인간성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들이다. 나는 그 가게들에서 냉면과 국밥을먹고 맥주를 마시는 이들과 더불어 즐기며 사람다운 삶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켰다. 잘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한 가게를 100년 가게‘로 지켜내는 일은 곧 100년을 버티는 골목을 만드는 일이고, 그런 골목을 곳곳에 일구어가는 일은 100년을 거뜬히 견디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사람의 삶은 그 문화를 토양 삼아 꽃 피운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가지고 있고, 이런 척박한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식탁을 차리며 100년 가게의 첫발을 떼고 있다

낯선 만남들은 계속될 것이다. 보수적인 사람인지라,미지의 영역 
없이 세상 모든 것이 그냥 그렇게 퍼즐마냥 딱딱 맞춰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멈춰 있을 수 없고, 불편하다고 누군가를 지울 수 없으며, 함께사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어깨를 부딪치며 만석의 지하철을지나야 하는 시끌벅적한 삶에서 타인이 그저 불편함이라 여겨질지 모르나 결국에는 대도시라는 이름의 좁은 농성장에서 살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딱한 존재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자.

땅과 집을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숫자로치환되는 부동산의 렌즈로만 바라보니,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없고 있는 사람 쫓아내 그저 아파트를 짓자고만 한다. 그렇게세워진 아파트에 원주민의 자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내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나 같이 사람이라 불리며 자라왔는데 왜인지 우리에게는 마음 편히 누울집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무리 걷고 걸어도 땅은 이어지고, 천지에 아파트가 솟았는데 어떤 이들은 판자촌에 살며 화재를걱정한다. 그런 탓에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판자촌 볼썽사나워하며 개발만을 외친사람들이 방화를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이야기. 개발 지역에서는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동네를 슬럼화시키겠다며 이불에 오줌을 싸서 곳곳에 뿌려두지 않나, 한 덩치 하는 형님들이 괜히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주민들을 흘겨보지 않나. 부동산값이 사람 목숨값을 훌쩍 뛰어넘은 세상에서 인간을 향한 마지막 신뢰는 무너지고 갈등만남는다. 그 상황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삶을 찾아온 이가 떠날 때 허기지지 않았으면 한다.
이렇게나마 서로를 관여하며 잃어버린 우리 몫의 도시를 한뼘 한 뼘 되찾아오길 바란다. 결국 배고픈 사람들이 이 도시를만들었지. 이 허기짐을 홀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연대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잘 먹고, 잘 먹이며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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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들이 사법농단 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비로소 형사 사법 체계가 피의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알았다고 한다. 어떤 의사는 자기가 아파 수술을 받기 전 주치의가 수술 중 발생하는 상황들(죽을 수 있음도 포함)이 깨알처럼 적혀 있는 수술 동의서를 내밀며 서명하라고 하는 순간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고 고백하며, 자기가 환자들에게 무감각하게 전달한 무수한 공포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넓이와 깊이만큼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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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장부 속 검은 글자만 신성시하는 태도는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기업 회계장부에는 이윤을 남기는 과정에서 혹사당한 노동자의 사연이나 엄청난 양의 온실기체와 폐기물이 방출된이야기 따위는 실리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모순과 재앙이이 구조적 누락으로 거의 다 설명될 수 있을 지경이다.

이런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주장과 행동이 조선업 구조개혁의 계기로 이어지고 확대되려면, 이 하청노동자들이 속한 노동조합, 즉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주목해야 할 것은 금속노조가 ‘산업노동조합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산업노동조합이란 단순히 기존 기업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형태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산업노동조합은 (기업이나 직종을 넘어) 산업의 시야에서 노동자의 공동 이익과 연대의식, 대안을 만들어가는 조직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래도 ‘자본주의‘와구별되는 ‘산업‘의 논리를 분명히 하고 이를 대변할 만한 조직이있다면, 그건 바로 산업노동조합이다.
금속노조는 이미 작년에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 전환이 모든노동자에게 정의로운 과정이 되도록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는 노사정 협상과 공동결정법 제정을 주창한 바 있다. 우리 시대에 산업노동조합이 해야 할 임무를 뚜렷이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 시도였다. 그 임무란 ‘지구‘ 안에 자리한 ‘(인간)사회‘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와 구별되고 때로 대립, 충돌하기까지 하는 ‘산업‘의 역할과논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제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투쟁이 열어놓은 새로운 지평에서 이런 각성과 노력이 조선업 구조개혁의 진지한 흐름으로도 나타나길 소망해본다.

202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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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었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한없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존재는 사랑을 줄 줄 안다. 봉봉은 차갑고 이기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 내 안에도 사랑이 이렇게나 많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처음으로 알려준 존재다. 봉봉이 먹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데 목숨을 잃을까봐 먹지 못하게 막거나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만 할 때, 자유의지를주었다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누구보다 사랑한다면서 때때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을주는 신의 뜻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감으로 각인되는 기억들의 중첩 때문이라는 사실도.

"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 같아."
언니가 그렇게 말한 건 케이크를 먹던 중이었다.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과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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