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사소함이 쌓이면 삶이 풍성해진다. 정신없는일상에 즉석밥 하나 돌려 먹더라도 미리 만들어둔 사소함 몇개를 꺼내 상을 차리면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사소함 없이 삶의 거대한 담론들이 무슨 소용일까. 밥상을 차리는 일은 사소한 일로 치부되어 특정한 사람들의 노동에 기대어 너무 당연시되어 왔다. 나는 그 영역을 저임금 노동이나 헌신적인 어머니와 이모님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세상이 싫다. 음식을 하는 일, 밥상을 내는 일, 그걸 내 입과 다른 이의 입에넣어 삶을 유지시키는 행위는 인간의 자아실현 영역에 속한다.
서로의 삶에 관여 않고 말끔히 일만 하는 관계를 희망하는 것. 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먹지 않는 일은 타인의 고민이 되고, 대충 때우는 일은 모두의 걱정을 산다. 연대는 결국 서로의삶에 참견하는 일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끼어드는 일이다. 밥상을 차리고 나누는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서로에게 관여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 밥을 먹는 행위일 것이다. 식재료를 준비하고 지지고 볶아 그릇에 담아 한 상으로 내기까지, 정교하게 분업화된노동이 필요했다. 자기 몫의 생존만 고민해서는 지금의 사회가 만들어질수 없었을 것이다. 대규모로 농사를 짓고, 추수하고 탈곡하는 과정은 자신의 텃밭에서 나고 자란 것을 먹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행위로 여러 사람을 먹일 만큼의 양식을 생산한다. 그럴싸한 건물을 세우고, 정치를 하며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노동의 여력은 자기 몫이 아닌 ‘우리‘ 몫을 고민한 인간의연대로 마련된 것이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이 서로의 노동을 맞대어 협업으로 한 상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차려진한 상을 먹는 일은 공동체적 의식이다.
부끄럽다가, 위로받는다. 어젯밤 나는 우리 삶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을 떨쳐낼수 없었다. 꾸역꾸역 내 집 마련하겠다며 아등바등하다 인생을 다 허비해버리는 우리 인생이 불쌍했다. 사는 게 그냥 사는거지 꼭 내 것이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이 갈등과 야만의 세상이 싫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살아야 100년을 산다는데 그 인생의 대부분을 이번민에 쏟으며 불안해하는 것이 안쓰럽다고생각했다. 집을 구입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며, ‘막차 타기‘라던데 이 미친 세상에서 막차를 탔다 한들 다음은 또 자식 걱정에 부모 걱정까지, 아무튼 온갖 걱정거리 모두 이고 살며 끝나지 않는 계산을 하느라 애꿎은 머리만 쉼 없이 굴리는 부질없는 시간의 소모가 아까웠다. 나는 내가 불쌍했다. 그러고 나서 맞은 첫 끼가 이 만두이고 이 수제비여서좋았다. 미
여전히 이 도시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무한 갈등의 시대라 하고 모두가 부동산에 미친 것 같지만, 목소리 없는 사람들은 담담히 자기 일을 하며 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경쟁이 끝나기를가만가만 기도하고 있다. 공해 같은 온갖 정책과 구호가 담아내지 못하고 통계로 겨우 보일락말락 하는 그 목소리들. 딱 그만큼의 사람들이 이렇게 만두를 빚는다. 이렇게 고명을 만들어둔다. 이렇게 육수를 끓인다. 부질없고 하릴없는 숫자의 세계가 아닌 맛과 멋 실존의 세계에서 결코 떠남 없이 맨바닥에몸을 착 붙여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이의 노동. 용기를 내어 살자.
한국의 근현대사를 두고 압축적으로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고들 말한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도 너무 많다.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적산가옥들이 비명한 번 못 지르고 사라졌다. 자랑할 만한 유산이 될 수 있었던 숱한 가능성들이 개발 논리에 사라졌다. 어디건물만 사라졌을까. 공간이 사라지며 사람도 지워졌다. 문화도 지워졌고 함께 생존해야 한다는 연대 의식 또한 철거당했다. 거대한 도시와 그 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쉼없이 돌아가는 노동의 굴레, 그 굴레가 우리 삶을 집어삼킬 것처럼 굴 때도 든든하게 인간의 곁을 지켜준 것은 정성껏 준비한 한 그릇의 음식이었다. 그 시절 내 윗세대의 허기짐과 맛있는 한 끼의 갈망을 충족시켜준 가게들은 세월의 풍파를 거뜬히 견디고40, 50년 업력의 노포가 되었다. 내게 있어 그 노포들의 존재는 지난 수십 년간 너무 쉽게 쫓아내고 지워버린 인간성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들이다. 나는 그 가게들에서 냉면과 국밥을먹고 맥주를 마시는 이들과 더불어 즐기며 사람다운 삶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켰다. 잘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한 가게를 100년 가게‘로 지켜내는 일은 곧 100년을 버티는 골목을 만드는 일이고, 그런 골목을 곳곳에 일구어가는 일은 100년을 거뜬히 견디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사람의 삶은 그 문화를 토양 삼아 꽃 피운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가지고 있고, 이런 척박한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식탁을 차리며 100년 가게의 첫발을 떼고 있다
낯선 만남들은 계속될 것이다. 보수적인 사람인지라,미지의 영역 없이 세상 모든 것이 그냥 그렇게 퍼즐마냥 딱딱 맞춰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멈춰 있을 수 없고, 불편하다고 누군가를 지울 수 없으며, 함께사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어깨를 부딪치며 만석의 지하철을지나야 하는 시끌벅적한 삶에서 타인이 그저 불편함이라 여겨질지 모르나 결국에는 대도시라는 이름의 좁은 농성장에서 살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딱한 존재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자.
땅과 집을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숫자로치환되는 부동산의 렌즈로만 바라보니,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없고 있는 사람 쫓아내 그저 아파트를 짓자고만 한다. 그렇게세워진 아파트에 원주민의 자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내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나 같이 사람이라 불리며 자라왔는데 왜인지 우리에게는 마음 편히 누울집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무리 걷고 걸어도 땅은 이어지고, 천지에 아파트가 솟았는데 어떤 이들은 판자촌에 살며 화재를걱정한다. 그런 탓에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판자촌 볼썽사나워하며 개발만을 외친사람들이 방화를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이야기. 개발 지역에서는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동네를 슬럼화시키겠다며 이불에 오줌을 싸서 곳곳에 뿌려두지 않나, 한 덩치 하는 형님들이 괜히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주민들을 흘겨보지 않나. 부동산값이 사람 목숨값을 훌쩍 뛰어넘은 세상에서 인간을 향한 마지막 신뢰는 무너지고 갈등만남는다. 그 상황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삶을 찾아온 이가 떠날 때 허기지지 않았으면 한다. 이렇게나마 서로를 관여하며 잃어버린 우리 몫의 도시를 한뼘 한 뼘 되찾아오길 바란다. 결국 배고픈 사람들이 이 도시를만들었지. 이 허기짐을 홀로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연대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잘 먹고, 잘 먹이며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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