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두 번째 원고 ㅣ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평점 :
사계절의 《두 번째 원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들이 등단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픈 취지로 시작됐다. 한국 문단 시스템과 신예 작가의 속사정을 세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 처음은 있고 그 일을 지속하고 싶은 이들에게 작업을 내보이고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 장은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일 것 같다. 이 성긴 사고과정을 거치자 사계절 편집부의 따뜻한 생각과 신예 작가들의 작업에 응원을 보태고 싶었다.
함윤이 <규칙의 세계>
이방인은 미숙하고 취약하다. 자신이 속한 장소의 규칙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고 빈번히 위기에 처한다. 바꿔 말하면 이 실수와 위기는 낯선 세계와 교류하고 섞여보려는 시도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규칙의 세계>는 이 메커니즘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서로가 피차 취약할 때 돈독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임현석 <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편지 형식의 서술. 문단에 몸 담은 화자와 진영(?의 갈등이 이야기의 골자다. 화자는 보수, 의미, 권위를 한 범주로 진보, 형식, 도전을 다른 범주로 묶어 대립시켜 자신을 변론한다. 변론은 묘사가 많았고 완고해서 숨이 죄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답답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분법적 분류에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부수고자.
유주현 <꿈과 광기의 왕국>
여성과 광기를 다루는 텍스트. 여성과 광기의 조합과 독해는 논쟁적이다. 누구의 관점에서 광기를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큰 폭으로 달라진다. 마을을 관리하는 실세 ‘윤여사’는 아내와 엄마로서 역할에 자신을 바쳤고 이런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존재에게 거북함과 적의를 드러낸다. 어느 날 세입자가 자살했던 한 집에 망나니 같은 ‘여자’가 이사 온다. 그는 무례하고 살기 흐르는 행동거지로 ‘윤여사’의 상식을 엎어버린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윤여사’는 광인보다는 평범한 시민이다. ‘윤여사’의 대척점에 ‘여자’가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사회의 논리가 남성의 위치에서 짜여졌음을 고려한다면 ‘윤여사’와 ‘여자’에 대한 분류와 의미는 달라질 것.
박민경 <긴 하루>
요양원 운전기사 병철이 등장한다. 병철은 사회(관계)로부터 무참히 고립된 처지는 아니지만, 그의 삶 전반은 휘청거린다. 폭풍 전야처럼 흐리고 고요한 하루가 불안을 자극하는 상황에서 병철은 의연하면서도 미세하게 동요한다. 긴 하루가 하루이틀 찾아오고 말 손님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김기태 <태엽은 12와 1/2바퀴>
시간의 흐름, 드넓고도 광활한 그림자가 이야기에 드리워져 있다. 화자인 ‘그’의 여관은 게스트하우스로 변했고 로비에 세워진 괘종시계의 태엽은 점점 느슨해진다. 시간은 물건과 공간에 새겨지며 형체를 얻고, 그렇게 시간의 진행이 남기는 씁쓸함과 어쩔 수 없음을 감각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