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 사회적 몸과 예배의 작동 방식 문화적 예전 시리즈 2
제임스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IVP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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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욕망은 예배다.

「왕을 기다리라」(Awaiting the King: Reforming Public Theology)를 마지막으로 올해 완간 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의 문화적 예전(Cultural Liturgies) 3부작 중에서 2번째 책인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Imaging the Kingdom: How Worship Works)는 기독교 세계관의 현실화를 고민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응답하는 책이다. 답은 이미 책의 제목 속에 나와 있다. 예배를 잘 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주장은 대중 집회나 설교단에서 흘러나오는 예배 잘 드리라는 강한 어조와 언뜻 들으면 협박에 가까운 저주의 메시지-이제는 아무 효력 없는 구호처럼 들리는-와는 차원이 다르다. 


스미스가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의 전작인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 Worship, Worldview, and Cultural Formation)의 주제였던 ‘우리가 욕망(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이며,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 곧 우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기인한다. 이것은 또한 토라의 전통이기도하다. 학자들은 십계명의 제1계명(예배)과 제10계명(욕망)을 대구가 되는 계명으로 해석한다. 이는 1계명과 10계명이 다른 전체 계명을 감싸며 관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전통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도 탐심을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규정하였다(골3:5, 엡5:5). 우리는 욕망하는 것을 예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편 115편은 사람은 욕망하는 것을 닮는 존재로 규정한다. 우상을 욕망하는 자는 우상의 본질인 물질적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예배는 우리가 욕망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달리 말해 사랑하는 행위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대상을 소유하고 닮는다.

이러한 실제적인 예를 인류 최초의 ‘욕망’(hamad)에서 찾을 수 있다. 에덴동산에 만들어진 나무들과 그 열매를 보고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욕망)”라고 말씀하셨다(창2:6). 하나님은 자신이 먹기에 옳다고 인정한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욕망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하고 자유로운 욕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옳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인간이 먹기에 옳다고 인정한 것을 욕망하는 존재로 변한다(창3:6).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욕망을 인간의 옳음에 참여하는 도구로 왜곡시켰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욕망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욕망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는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행위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예배이며,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Gotta Serve Somebody”의 가사처럼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를 섬기고 욕망하는 존재이다. 두 번째로 인간은 욕망과 예배를 통해 그 대상인 하나님의 옳고 선함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선함을 닮아가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옳음에 참여하며 그것을 닮을 수밖에 없다. 이 두 사실은 예배의 두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이는 ‘일상’(ordinay)과 ‘참여’(participation)이다.


스미스는 과거의 주지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 일상성과 참여적인 지식의 신체적인 특성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흔히 ‘몸 철학’으로 알려진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을 집필하여 몸과 지식의 관계성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같은 시기에 다른 영역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주장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리화학자인 폴라니(Michael Polanyi)는 지식을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이라고 정의했으며,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인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또한 숙련된 기술자들에게는 매뉴얼만으로는 전수 할 수 없는 지식의 영역이 있다고 하였다. 인격적이며 신체적인 참여 없이는 체득할 수 없는 영역의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신체적인 참여에 의한 지식이란 계속되는 참여와 실행을 통해 일상화, 습관화 되며, 그 결과 제2의 본성이 되어 의식 아래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식욕, 성욕처럼 본래적인 욕구로 변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존재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 지식은 바로 ‘나’이며 ‘나’는 바로 그 지식의 유기체다. 또한 스미스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사상을 통해 메를로퐁티의 사상이 빠질 수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성향을 보완하고자 한다. 지식은 개인적인 습관을 통한 신체화의 과정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습관화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화란 개인의 몸인 동시에 집단적인 몸의 특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겨난 의문점은 지식에는 분명히 신체적 특성이 있지만 그것이 다른 것에 앞서며, 본질적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이미 형성된 신체성에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지식은 견고하고 거의 불변하는 보수성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미스는 은유와 상상력에 의존하여 보수성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신체성 안에 존재하는 은유와 상상력은 신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미 어떤 지식이 신체에 형성되어 천성이 되었다면 그 지식이 옳지 않을 지라도 이를 축출하기란 불가능하다. 죽음 외에는 신체에서 지식을 분리할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식을 다측면적으로 이해하면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이것이 중세의 암흑기에 빛을 비춘 이성과 의식 차원의 지식의 다른 측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주지주의는 폐기되어야할 구습이 아니라 공존해야할 지식의 다른 얼굴이라는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독교의 예배는 달라져야 한다. 죄의 신체성을 깨기 위해 매일 초월로 부터 오는 의식 차원의 지식을 얻어 이 지식을 신체화 하는 예전(예배 의식) 속에 언제나 신자는 서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와 묵상으로 말씀의 뜻과 의미를 파악하는 것 뿐 아니라, 단순히 과거의 예전을 반복하는 습관의 형성에 그치는 것도 아닌 이 둘의 균형과 선순환 구조가 견고하게 자리하는 예전이 필요하다. 위에서 내려오며, 아래에서 참여하는 통합된 예전으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닮을 것이다. 또한 그 예배가 일상화되도록 욕망에 대한 바른 이해에도 신경써야한다. 예배는 신자의 삶으로 확장되어 일상화 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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