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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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F 보다 vol. 얼음>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꼭 읽고 싶었던 이유는 천선란 작가님과 구병모 작가님의 SF 단편선을 꼭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가제본이기 때문에 추후에 출판된 책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

 

구병모 작가님의 책 중 <위저드 베이커리>를 정말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 읽어서 세세한 책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결말이 x, y 두 가지 엔딩이었던 기억이 난다. 엔딩을 두 갈래로 나눈 것 자체를 한 편의 글로 완성시키신 그 독특하고 특별한 엔딩이 마음에 들었다. 천재라고 생각했었다, 어렸을 때.

천선란 작가님은 <천 개의 파랑>이라는 책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의 책과 영화 메이트인 엄마가 좋다고 했던 책이라 안 그래도 읽으려 했던 작가님이었다.

 

그래서 신청하게 되었고,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구병모 작가님과 천선란 작가님 작품을 보러 갔다가 곽재식 작가님에게 빠지게 되는 엔딩에 이르렀지만... (웃음) 재미있게 잘 읽었다.

 

단편선만의 매력이 있다. 장편소설은 바쁜 삶 속에서 읽으면 간혹 줄거리를 놓치게 되거나 그런 긴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혼란의 시기가 있는데 단편은 호흡이 짧기 때문에 단시간에 집중해 읽기가 쉽고 또 이렇게 다양한 작가들이 모여있는 단편선은 그 문체와 스타일이 다른 양질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주제는 ‘얼음’이다. 각 작가들이 얼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얼음, 이전의 빙하기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미래를 그려놓았던 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인류세에 대한 다 분야의 관심도도 높고, 현재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머나먼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영화 듄도 그렇고 누군가 먼 미래는 결국 우리가 지나온 시절, 과거와 매우 닮아있을 거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부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한 인간으로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이 단편에 실린 모든 글들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나의 원픽은 단언컨대 이 작품이다. 나는 곽재식 작가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 책을 읽고 ‘대체 누구지’ 싶어서 검색해 보고 아 이 분이 유퀴즈에 나오셨던 <한국 괴물 백과>를 쓴 사이버 숭실대학의 생명공학과 교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그만) 첫 문장부터 나를 끌었다. 그건 이 책을 읽던 내가 마침 등장인물에 대한 희곡을 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 문장은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이게 다 무슨 짓인지도 정확히 안다. 나는 소설의 등장인물이다.”로 시작하는데 이미 이때부터 나는 미쳐있었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이나 책 속의 주인공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냥 천재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메타 소설의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에 가서는 이 글이 어디로 도착할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여행이 즐거우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나 싶을 정도로 순간에 몰두하게 되지 않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의 재미에 나를 맡기면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글들이 있다고, 그런 책들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역시나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은 늘 보아도 너무 이렇게 효과적인 기술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노멀하지만 노멀한 게 최고! 그리고 나는 이야기가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되게 좋아한다.

 

인상 깊었던 구절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나열해 보겠다.

 

8p. 이제 여러분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게 다 소설이라고 다짜고짜 밝히면서 시작한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끝이 날지도 궁금할 것이다.

: 뒷부분까지 적으면 너무 스포일 수 있어서 적지 않았는데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정확히 ‘결말을 대체 어떻게 끝내려고 이 사달을 내셨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나의 마음을 들킨 순간 그다음부터는 어떤 의심도 다 접고 마음 편하게 따라갔다.

 

13p. “그래서 그 많고 많은 종족 중에 일부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가질 수도 있어요. 물론 그런 종족이 있을 확률은 아주 극소수이기는 하죠. 그런데 아시죠? 우주가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것. ~”

: 전개에 아주 중요한 내용. 보통 새로운 세계관이나 우리가 모르는 시대를 쓸 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된 건지, 될 건지 작가들이 설명을 해주는데 이 부분은 뭐랄까 사실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나를 홀리는? 주문 같은 부분이라서 정말 놀라웠다. 이런 필체라면 보이스피싱처럼 그냥 속아넘어가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 고리가 걸리면 독자는 그대로 결말까지 끌려가는 것이다.

 

15p. 이제야 깨달았지만 그 이유라는 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전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 이런 거, 이런 거!!!! 내가 원하던 문장!! 사실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구구절절 적는 구절들 그런 책들 작품들이 많이 떠올랐다. 애써 숨긴 척하지만 사실은 전혀 숨겨지지 않았던 것들. 그런데 이렇게 투명하게 드러내니 그 얼마나 좋은가? 가식 없이! (사실은 치밀하게 짜인 문장이겠지...)

 

20p. 국가는 계속해서 새로 법을 만들거나 있던 규정을 고친다고요, 1년 평균 3,200건의 규정 추가나 수정이 일어나는 게 보통이에요. 그러니까 1년 동안 우리가 온갖 분야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나면, 그렇게 조사를 한 만큼 다시 새로운 규정이 만들어져 있어요.

: 이런 느낌의 문장들을 표시해 놓은 게 한 3-5개는 되는 것 같다. 주인공이 생사귀에게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말해주는 부분이지만 사실은 독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인 부분들. 저 문장이 매우 공감이 갔던 게 규정이 얼마나 많이 바뀌고 그에 따라 우리가 매번 공부해야 하는지 이전의 법을 외워놓으면 다시 법이 바뀌고 이런 현상들을 이야기 안에서 꼬집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허구지만 사실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닮아있다는 그 사실이 이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들어주는 매력이었다.

 

27p. 이 모든 것은 어차피 다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다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 나는 지금 이 시간, 현재를 살면서 내가 어떤 결정을 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후의 모든 시간, 내 삶의 모든 사건은 이미 다 글로 써놓은 내용처럼 과거도 미래도 다 나와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내 삶도 누군가 책으로 읽고 있다고. 그러니 사실 우리도 우리 인생의 등장인물로 친다면 뭔가 힘들고 어려운 것들이 좀 바람 빠지고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지 않나. 그러니까 다 정해져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거다. 내가 힘든 것도 다 정해져 있다. 어떤 좋은 일도 다 정해져있던 것, 나쁜 일도 다 정해져있던 것. 이렇게.

 

결말이 너무 마음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바람 빠지는데 좋은 결말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리 치밀한 것보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그렇게 결론 내려버리는 게 중요할 수도 있겠다. 삶은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니까.

 

2. 구병모 <채빙> - 짧은 이야기 안에서도 느껴지는 장엄함과, 따뜻한 희망

 

앞서 언급한 곽재식 작가님의 글과는 다른 스타일의 글이다. 머나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묘사되는 풍경들은 마치 선사시대를 보는 것과 같다. 제의적인 느낌도 들어서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배웠던 역사의 지식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간결한 제목답게 굉장히 압축적인 단어들만으로 거대하고 장엄한 풍경들이 그려지는 이야기였다. 이 시대에서 얼음은 굉장히 소중한 재화로 사용된다. 이 소설은 사한의 시선으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사한을 검색해 보니 ‘얼음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뜻이었다. 일단 사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흥미로움과 독특함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이라 믿지만 사한 스스로는 그것이 우습다 여기는 부분들에는 뒤틀린, 비릿한 웃음이 새어나기도 했다.

간결하고 압축적이고 장엄한 듯한 단어들 사이에서 나를 사로잡은 문장들은 예상외로 좀 단순하고 깔끔하고 정서적인 문장이었다. 제단에 꽃을 올리며 ‘당신을, 닮았습니다’라고 말하던 사람. 세상이 얼어붙어도 얼어붙을 수 없게 만드는 마음들이 있다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믿고 싶은 소설이었다.

 

41p. 먼 옛날에는 멀리 있는 사람과 코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도구가 있었다고 하나 당장의 마실 물이 문제.

: 그러니까 아마 저 도구는 핸드폰일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는 우리의 현시대가 먼 옛날이 된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문장이었고 나는 환호했다. 먼 미래에 우리가 선사시대같이 사실은 아주 과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49p. 당신을, 닮았습니다,

:이 명료하고 분명하게 다가오는 다정한 감동. 단언컨대 내가 이 소설에서 꼽고 싶은 문장은 이 문장이다. 구병모 작가님의 <채빙>을 읽어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그리 새롭지도 않은 이 문장이? 왜 어째서? 그러나 나는 이 문장에서 작가님의 기술을 읽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사실 간혹 어떤 작가들은 단어의 힘을 받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럴듯하게 문장을 꾸며낸다거나 (사실 뚜껑을 열어보면 그리 대단치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 글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이 문장은 단순하고 압축적이고 간결하면서 앞뒤 맥락상 내게 주는 울림이 대단하다. 게다가 이 시대를 설명하느라 이 문장이 아닌 다른 부분의 문장들은 굉장히 장엄하거나 어려운 단어들이 있는데 오히려 대조를 이루며 이 문장을 매우 빛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나는 믿게 되었지, 어떤 순수함. 사한에게 기도를 하러 오는 그러나 목적의식이 매우 뚜렷하거나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들과는 다른 어떤 인간적인 면을. 그런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게 되는 문장이었다. ,를 사용한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냥 당신을 닮았습니다 와 당신을, 닮았습니다는 정말 다르지 않은가. ,에서 뭔가 주춤하는 듯한 어투도 느껴지고 아니면 왠지 어떤 생각을 하느라 잠시 쉬었다든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는 좋은 부호의 쓰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59p. 내게 너희의 생명을 위탁하지 말라.

 

66p. 지금의 기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기복이나 신앙의 의미가 아니라 묵념의 일종, 정지된 생명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다. 그들은 행복도 믿음도 필요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한 조각의 믿음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유일한 믿음으로 간직한 세대다.

 

: 신은 무엇일까. 어쩌면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낸 이유는 인간과 인간과의 진심 어린 교류가 그런 맹목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들어주길 원하고 해주길 원하는 그런 과한 마음들보다 꽃을 건네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결국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싶다가도 품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든다. 신은 결국 우리가 우리 인생이 고달파 만들어낸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3. 남유하 <얼음을 씹다> - 이리도 애잔한 공포가 있나

 

이 소설에 대한 키워드를 적어본다면 ‘고어’ ‘공포’ ‘잔인함’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쓰인 소설 중 제일 잔인했다. 인간이 죽으면 그 인간의 시체를 먹는 인육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게 사람들끼리 합의된 사회적 약속이었다는 점에서 더 무서웠다. 다만 주인공은 그런 사회에서 좀 유별나게 자신의 자식이 죽어도, 먹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제일 좋은 갈등 아니겠는가. 그 사회의 규범이나 제도와 반대로 걷는 사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가 가족이 죽었다고 먹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하는 주인공이 너무 이해가 돼버리는 상황.

개인적으로 이런 파격적인 소재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딱히 보면서 징그러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상상은 가끔씩 현시대의 도덕과 법을 넘어서기도 하지 않나. 재밌다고 느끼면서 읽었다.

 

84p. “그 연한 살점이라도 남겨주지 그랬니. 요즘 치아도 부실한데.”

: 여기서 정말 터져버렸다. 어머니가 손녀를 되게 사랑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게 정말 아이러니한 지점이라서 비스듬하게 웃은 기분이랄까.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에서 우리가 법이나 제도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물론 이 생각은 이 소설과는 조금 어긋난 방향의 생각 같긴 하지만)

 

그리고 대체 결말이 어떻게 끝날까 매우 궁금했던... 새롭진 않더라도 예상했었어도 그 장면을 상상하니 정말 피가 거꾸로 솟고 차갑게 얼어버린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맘에 드는 결말이었다. 결국 내내 피해오던 어떤 일을, 결국은 하게 되고 마는 것. 이쯤 되면 나는 인간을 모질게 구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건가? 인간은 폭력적이고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니 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즐겨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가끔 내 글에서 인간들을 못살게 군다...

 

4. 박문영 <귓속의 세입자> - 사람을 싫어하다가도 사실은 싫어하긴 또 싫다

이 소설에 대한 느낌은 좀 이상하다. 제목 그대로다 귓속에 들어온 아주 작은 생명체, 세입자와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106p. 혜빈은 반투명체를 들어 왼쪽 귀에 넣었다. 그의 말대로 귀가 살짝 차가워졌다. 그가 앞날을 알려주겠다거나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을 꺼냈다면 둔치를 바로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반투명체는 그저 덧없고 하찮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허망한 농담을 할 줄 알았다.

: 이 구절에서 너무 맘에 들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맘에 들 거라 예상했지만 뒤로 갈수록은 앞의 문장만큼 나를 매료시키진 못했다. 앞날을 알려주겠다거나 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거짓말. 그런 거짓말들은 이제 너무 내치기 쉽고 대신 덧없고 하찮은 빛을, 허망한 농담에 웃고 떠드는 것이 요즘 나의 일과라서 단번에 빠져들었다 이 문장에. 어쩌면 우린 허망한 농담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까 사실은 영원보다는 허망함에 기대야 하는 건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118p. 애정은 불안정해요. 순식간에 광기로 넘어가요. 그러니 스스로 뭘, 왜 좋아하는지, 항상 돌아보고 고민해야 해요.“

: 뭐야.. 이거 난가. 나는 관계나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광기로 넘어가지 않게 늘 다스리려고 하고. 그러나 사실 애정이라는 게 그렇다. 광기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주체할 수 없는데 그래서 늘 내가 행한 일, 나의 마음에 대해서 늘 잘 들여다봐야 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고 이 문장을 읽는 것도 내가 돌아보고 고민하는 행위의 하나겠지.

 

123p. 하지만 조화와 균형을 이런 식으로 맞출 순 없었다. 사람들이 싫었지만,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건 더 싫었다.

: 이것도, 매우 나다. 읽는 내내 이 주인공의 냉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내가 다 마음이 불편했는데 결국 이런 결말이라면 나.. 울 수밖에. 울진 않았지만 거의 그런 마음이었다. 나도 사람들이 싫고 때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상식과 도덕성을 갖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가 다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치기 어린 분노다. 실은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모두가 다른 재능이 있기에 굴러가는 세상. 그리고 그 조화와 균형을 다만 누구도 다치지 않게 잘 유지해나가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5. 연여름 <차가운 파수꾼> - 곁에 누군가 있는게 좋더라

‘선샤인’이라는 이름의 냉기 어린 존재가 아파트 아래에 숨어들면서 땅을 지켜주기로 약속하고 선샤인을 돌보았던 이모. 그 이모를 대신해 노이가 이제 그 선샤인을 돌보게 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제트도 함께인 이야기.

 

나는 때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인간 덕분이라는 사실을 매우 망각하고 마는데 이 소설에서 이제트와 이노를 보면서 또 한 번, 사람을 믿기로 했다. 아쉬운 건 내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 결말에서 응?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나의 이해력과... 오독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참고해 이해해 보는 것으로)

 

6. 천선란 <운조를 위한> - 운조가 경험한 세상이 어디에나 있을까

수의사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야기. 그러나 뒤로 갈수록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뒷부분이 난 좀 더 취향이었다.

 

168p. 그래도 자신을 처음 받아주었던 인간 손에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무지를 위한 생각은 아니었다. 오로지 운조,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

: 무지는 암소다. 운조는 암소를 죽이러 갔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운조,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는 저 문장에 극히 공감했다.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 정말로.

 

171p. “냉동해놨다가 저 죽는 순간에, 그때 깨울래요. 그때 같이 눈 감고 싶어요. 제발요, 빨리요. 이러다 정말 숨 끊어지겠어요.”

: 죽어가는 고양이 메리를 데려와서는 냉동시켜달라던 보호자. 이때 나는 냉동까지 해서 계속 곁에 있고 싶고 두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다마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냉동을 해야겠는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이걸 다 장하다 해야 해 이기적이다 해야 해 이기적인 다정함이라 해야 해, 그런 생각들.

 

190p. 운조는 새끼가 아프게 죽기를 바랐다. 치열하게 싸우길 바랐고, 배고픔에 무언가를 죽이고 잔인하게 뜯어 삼키길 바랐다.

: 예전 같았으면 어릴 때였더라면 나는 이 문장을 그냥 지나쳤을까. 아픈 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그리고 잔인하게 죽이다니 잘못된 일이라고 하면서? 운조가 수의사인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에 이런 전개로 풀어가려고(궁금하면 사서 보세요 훗)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보다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 운조가 새끼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나에게 이런 마음일까?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내 집중력이 흐릿해지다 보니 글이 좀 짧아졌다.

이렇게 짧은 나의 집중력과 이해력으로는 더 재미난 장편들은 대체 지금까지 무슨 호흡으로 읽어왔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서평 이벤트로 받은 책들 중에 단연 탑이다.

 

작가들이 이리 내가 보지 못한 세계들을 지면으로 날라주는 이 일을 영원히(영원한 건 없지만) 지속해 주었으면 좋겠다.

 

#SF보다 #SF보다_얼음 #SF 보다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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