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이후 페미니즘
한나 스타크 지음, 이혜수.한희정 옮김 / 이상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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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20세기 후반의 문학사나 예술사를 정리한 개론서를 보면 공통으로 등장하는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을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정신보다는 신체를 강조하는 경향이다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사조는 문학에서 미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는데, 기존의 틀이나 형식을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과문하지만내가 아는 문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꼽는다면, 나는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을 들고싶다일정한 플롯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웅얼거리기만 하는 <몰로이>는 소설적 스토리라인이 없는, 소설같지 않은 소설이다. 읽다보면 이게 무슨 소설인가 라며 툴툴댈 정도다. 하지만 맥락없이 웅얼대는 몰로이의 독백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몰로이처럼 이리저리 헤매도는 일상의 내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 든다. 몰로이는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반복하지만 그 여정은 늘 실패로 끝나버린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도 많이 닮았다. 의미없는 일상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묘미를 담아낸 소설이랄까, 아무튼 묘하게 공감되는, 문학계의 돌연변이같은 소설이었다.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형식과 경계를 벗어나는 것을 지향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탈회화적 추상컨셉츄얼 아트(conceptual art), 팝아트 (pop art), 설치미술 등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화가나 조각가사진가 등은 경계를 두지 않고 작업하는데, 가령, 연필로 드로잉하다 필요하면 자신의 신체로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동영상을 찍거나 하는 식이다. 또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다양하게 결합해 예 불가능한 신종장르를 생성해내기도 한다. 미술계의 돌연변이들이다.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들뢰즈의 사유는 참으로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여러 개념 중에서도 특히 ‘생성(되기, becoming)’이라는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맥 상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칡 넝쿨처럼 얼키고 설키는 수많은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된다. 복잡다단하게 세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화할지는 아무도 예측못하기에 그냥 돌연변이같은 존재로 부르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되기(becoming)’ 개념이다. 


모든 되기는 소수자-되기(becoming -minor)되기는 여성-되기(becoming -woman) 통해 처음으로 일어나며다양한 되기를 거치면서 지각불가능한 -되기(becoming -imperceptible) 나아간다.”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한나 스타크 이혜수 한희정 옮김이상 북스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은 소수자-되기를 강조한다. 그런데 왜 여성 -되기, 나아가 여자아이-되기일까. 여성은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다수자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남성은 다수자에 속하므로 남성-되기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다수자가 소수자의 처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갑의 위치에 있는 자가 을을비장애인이 장애인을,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성인이 아닌 여자아이는 잠재력이 가득한,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존재다. 그러므로 미래지향적이다. 하여튼 소수자-되기란, 차이를 동반하는 N개의 성으로 분열되는 것이고 그것들이 얼키고 설키며 골백번을 마주치고 마침내 지각불가능한 신종 돌연변이로 화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해석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자 되기란 다수자 기준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페미니즘은 끊임없이 다수자를 뒤흔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책의 저자는 말한다.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이 젠더평등을 주창하는 젠더정치의 성격이 짙었다면 이제는 젠더 너머를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 계급, 문화와 같은 복잡한 변수들을 반영한 페미니즘 운동은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자-되기로부터 시작한다. 


들뢰즈의 사유가 어렵기는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개념들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현시대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의 사유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페미니즘과 연계한 이 책,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을 읽으며 되기, 생성, 돌연변이 등과 같은 개념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앞으로도 더 읽고 생각해봐야 할 게 많다. 금방 소화해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늘 뒷전에 모셔두었던 들뢰즈 관련 책을 이 참에 들여다보는 계기도 되었다.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을 읽으며 정처없이 부유하던 내 의식, 갔던 길을 반복해 오가며 미세한 균열과 차이를 느끼던 내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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