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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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이렇게 외치며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내가 보기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을 두고 고민하는 아이들을 보며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라며 울분을 토하며 화를 냈다.

답을 찾지 못해 헤맬 무렵

매 고민의 답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을 읽게 됐다.




청년 싯다르타.

2600년 전 인도의 한 젊은이는

성 밖의 늙은 병자와 썩어가는 시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저들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인간의 삶은 이다지도 불평등할까.’




‘나는 왜 고통 받아야 하는가, 나에게 삶은 왜 이다지도 불평등할까’

를 외치는 나와는 같아 보이지만 사뭇 다른 고민을 안고 있었던 청년 싯타르타. 

부끄러운 마음도 잠시, 궁금했다.

과연 그 청년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 했을지, 불평등을 어떻게 타파 했을지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대부분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하여 ‘개인’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청년 싯타르다는 말한다.

‘모든 고통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 자체에 있으므로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니 진정으로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야말로 나의 행복을 찾는 길이다. ’ 라고.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이 인도처럼 카스트 제도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열화된 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작금의 사람들 역시,

보이지 않게 타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은 비단 필자만 해 봤을까?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남의 아픔을 느끼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야 말로 내가 행복해 지는 길’이라니... 이상은 멋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부정 속에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느냐에 따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이나 조건이 때로는 특별한 사건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어떤 신적 존재가 나를 깨우치고자 일으킨 의미 있고 의도적인 사건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자신과 이웃에 얼마나 관심과 애정을 갖느냐에 따라, 또 사소한 문제라도 얼마만큼 신중하고 책임 있게 자기 문제로 성찰하느냐에 따라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발췌)

 살면서 똑같은 상황, 똑같은 문제에 부딪쳐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처음엔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일이 다시 똑같은 상황으로 부딪치자 별거 아닌 일이 되었고, 별거 아니라며 행했던 일이 타인에게 ‘감사하다, 고맙다’란 말로 도배 되어 돌아와 구석으로 숨고 싶었던 그래서 다시 똑같은 상황이 부딪쳤을 땐 진심을 내어 하게 되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했다. 결국 그의 말이 맞는 것인가?

고민이 행복으로 바뀌는 데는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생각’에 따라 바뀐다는 말. 이는 모든 일을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성찰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고통이 되거나 기쁨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진심을 내어 모든 일을 행한다면 나도 이웃도 다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묻는다.

‘내 문제도 진심 내어 살기 힘든데 어떻게 이웃의 일까지 진심 내어 사는가?’

고민이 길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을 끊고 싶었기에

더 고민하지 않고 일단 내 문제라도 진심을 다 해 보자 했다.

선뜻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기엔 겁이 났으니 말이다.

먼저 어지러진 내 방을 치워보자. 이런... 엄마가 너무 좋아한다.

늘 왜 나만 이렇게 일이 많냐 불평했던 회사일을 애정 있게 해본다. 세상에... 상사가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TV에서 아이티 긴급 구호 모금을 한다. 세상엔 불공평한 일이 너무 많다 혀를 차다 난 착한 놈이란 자기 만족감으로 전화 한 통을 한다. 참... 전화 한 통이 모여 아까 화면에 나왔던 눈이 큰 아이에게 분유가 지급된단다. 다행이다.  

가만 보면 내 문제에 관심 기울이고 애정 있게 사는 것이 반드시 나만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되묻는다.

그러면 이웃 문제에 애정을 갖고 행하는 일 역시 이웃만 좋은 것인가?

TV에 나온 수술비 없는 소녀 가장을 위해 전화 한통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몇 주 후 수술을 마치고 건강한 얼굴로 퇴원한 소녀가 나왔을 때 그 야릇한 기분을. 왠지 그 소녀 수술 봉합 실 값만은 내가 내 준 것 같은 뿌듯함을 맛보지 않았는가?

내 문제에만 신경을 기울이고 애정을 갖는 것만이 내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애초 나의 생각은 엎어 질 수밖에 없다.

이제 고통과 불평등에서 벗어나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시작점을 고민한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신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에 의해, 그것도 고통 받는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인간의 발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인간을 구속하고 종속시켜 고통에 빠뜨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자기 발원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완전한 인간 해방을 성취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역사 속에 던지 수많은 삶의 발자취입니다.  (본문 발췌)

내가 아닌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에서 ‘인간의 고통 해방’이 시작된다면 이제 시작은 한 것이다. 그러나 그걸 이루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붓다는 위대한 성인이니 가능했던 것이고 나는 범부중생이니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저 워밍업에서 경기가 끝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청년 싯다르타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수행자는 걸식해 온 음식을 먹어야 했던 모양이다. 싯타르타 역시 처음 걸식해 온 음식을 먹고 바로 토해 버렸다. 배고픔 보다 힘든 것이 걸식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호화로운 궁중생활의 습관이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싯타르타가 걸식한 음식을 토하듯 나 역시 ‘발원’을 위해 나를 온전히 던질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나에게도 ‘나의 행복이 우선이다.’는 습관이 있음을 알기에. 다만 걸식을 토하던 싯타르타가 마음을 돌려 앉혀 다시 걸식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나의 고통만을 생각하던 습관 역시 노력하면 점차 고쳐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선 단순히 붓다가 살아온 삶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습관이 올라오는 순간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방법론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이 여느 철학 서적이나 종교서적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아! 이런 삶을 살았구나.’ 가 아니라 가볍게 당신의 삶을 돌아보고, 당신의 삶을 알아가고, 당신이 진정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셈이다.

 지금 여기서 용기를 내 보자. 여러 번의 토악질 끝에 그가 걸식을 먹기 시작하였듯 우리도 여러 번의 토악질 끝에 결국 ‘타인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리하여 나의 고통도 내가 느꼈던 불평등도 별거 아닌 게 될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려 하지 않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실 변명일 뿐이고, 자신의 업을 합리화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자신의 업장 탓에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지 용기가 없어서 못 할 뿐입니다. (본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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