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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채식주의자 영혜는 다소 공포스럽기도 하며 충격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독자의 시선이 아닌, 영혜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손을 묶고 입을 벌리게 한 후 고기를 먹이려는 아버지나, 자신의 손발을 묶고 미음을 먹이려고 코에 튜브를 삽입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영혜는 어떤 심정일까. 이들은 영혜가 왜 먹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가 꿈을 꿨다고 말했을 때, 이해할 수 없다며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는다.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 강압적인 방법을 택해서라도 먹이고 싶은 것이다. 마치 동물대하듯이.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트라우마와 오토바이에 연결된 줄에 묶인 체 끌려가는 개를 보며 느꼈을 잔인함이, 현재에 남편의 무신경함과 강압적인 태도로 폭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느꼈을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채식주의자를 택했을 것이다. 삶에서 공포를 느낀 것은 영혜였지, 영혜를 봐라보는 언니나 가족들, 의사와 간호사가 아니다.
영혜는 언니가 말했듯이, 남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끼며 그러던 어느날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것 일 수도 있다. 살아갈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차라리 나무가 더 나을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기준선을 정해놓고 거기서 벗어나게 되면 힘을 사용해서라도 그 인간을 기준선으로 돌려놓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나무가 되려는 것 마저도 영혜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혜의 언니 남편은 영혜에게 누드모델을 제안하며,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녀는 무언을 전할 뿐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수락인 듯 보인다. 그의 요구는 예술이라는 면목 하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는 자신의 몸이 보잘 것 없으니 자신보다 좀 더 젊은 J에게 영혜와 성관계 하는 것을 찍자고 제안한다. 영혜는 무언과 웃음을 취할 뿐이지만 이 역시 그는 수락으로 간주한다. 영상 촬영 도중 J는 수치스럽다며 서둘러 떠난다. 영혜는 이미 스스로를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 적 없으며 수치심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그와 영혜는 영혜의 집에서 관계를 맺고 하룻밤이 지난 후 그의 아내가 찾아와 자신의 동생과 남편의 행동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보게 된다. 아내는 최소한의 말만 언급하며, 지금 껏 살아온 방식처럼 인내할 뿐이다.
영혜의 언니는 자신의 남편과 영혜의 성적인 관계와 더불어, 육아 문제와 자신의 가게 운영 등 사회에서 살아가며 유지해야만 하는 것들과 인내로서 버티는 그녀의 삶에 의심을 품게 된다. 과연 자신이 옳은 것인가. 그녀는 열아홉살에 집을 떠나 누구의 힘도 받지 않고 서울 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을 한 번도 위로조차 해주지 못했다. 오랫동안 쌓여온 뜨거운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녀는 망연히 바라만 볼 뿐, 어찌하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으며, 고단한 삶이 연극이나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산에 올라가 세상과 결별하려 뒷산에 올라가지만 끝내 하지 못한다.
"시간은 가혹할만큼 공정한 물결이여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 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와 영혜의 차이점은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있느냐 마느냐인 것이였다. 영혜는 끈을 놓아버렸기에 정신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고, 그녀는 놓지 못했기에 세상과 결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인내의 삶을 살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놓지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들 지우가 아니였을까한다.
사실 우리는 연극같은 삶을 살고 있다. 소설 속에서만 봐도 영혜와 그녀의 남편, 영혜의 언니와 그녀의 남편은 처음부터 서로 애틋함은 없었으며 오직 사회에서 원하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결혼 했다. 서로 열렬한 사랑은 없었다며 단정하며 말하기에 이렇게 말해도 무방한 듯하다. 현실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연극의 삶이 펼쳐진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본능이 아닌 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살아나가야 한다. 더구나 살아가면서 받는 수많은 정신적 고통은 또 어떤가. 어느 누구라도 끈을 놓아버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끈을 놓더라도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영혜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끈을 유지해도 끈을 놓아도 고통의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