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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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체코인가?
결국 유대인이였다. 1920-30년대 체코 지식인들이 모여 만담을 나누던
프라하의 빌라...
유대인 거주지역이 넓게 분포한 프라하의 20세기 초...
결국 유대인이였군.

결국은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궁금이다.

차뻭의 2페이지짜리 글에 보면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
‘과학적 유물론‘
‘형이상학적 고뇌가 결여된 현대 과학자‘

유물론은 다양하게 해석가능하지만 쉽게 말해서 요새 말하는
‘영혼이 1도없어‘에 대응하여
영혼이 1도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넌 유물론자니?‘라고 하면 적절하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생산성 개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근의 기계화와 맞물리고, 제갈량의 목우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이것에 사로잡힌다.

차뻭은 궁극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극한의 생산성을 도달하는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은 생산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기계(로봇)의 창조주지만
그 순간 인간은 무용지물이 된다.

잠시 매트릭스로 가보자. 매트릭스는 모든 sf물이 그렇듯이 신에 도전한
인간의 궁극을 보여준다.
애초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이 도리어 그 기계(로봇)이 신의 영역에 도달함으로써
신의 영역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순간의 인간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결국 차뻭이 이러한 상상의 극단을 통해 보여주거나 일깨워주려는 것은
당시 시대가 유물론 중심(특히 유물론은 칼맑스로부터 비롯되어 사실 맑스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주의의 근간이 되어버림으로써 굳이 자본주의로부터 배척당할 필요는 없지만
배척되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형이상학적 고뇌가 결여되어가는 시대상, 즉 영혼을 잃어가는 시대에 대한 염려?인듯하다.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보면 매트릭스 전반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사랑이다.
연인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인류애 등으로 간간히 보여지는 것은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사랑에서
좀 더 진보하여 결국 차뻭이 말한 형이상학적 고뇌 즉, 영혼과 맞닿게 된다.

가장허무한것은 이 기계의 궁극도 영혼을 탑재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영혼을 탑재한 기계는 인간과 다를 것이 없어지고 인간과 기계의 경계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남는것은? 남는것은 없다. 다만 매트릭스에서는 인간이 세계의 영속을 위한 기반으로
활용?(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기존인간)과 새로운 인간(매트릭스세계속의 시스템 또는 차뻭의 영혼을 담은 기계)로
구분이 된다.

즉, 신의 영역에 도달한 인간의 결과는
지금과 다를 것이 없지만
어떻게든 기존인간과 新인간이 구분되어진다면
결국 지금의 영혼이 결여된 생산성의 극한으로 치닫는 것은 결국 기존인간에게
별 무의미한 짓이라는 교훈을 전한다.

난 이러한 상상도 해본다. 결국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노동해방을 위한 기계화를 궁극으로 진행해봤자.
남는게 없다. 기계의 노동조합? 사실 우리가 모두 같은 인간이지만 계층이 나뉘고 계급이 나뉜 현상황에서
초미래의 기존인간과 新인간의 세상이 다를게 무엇인가?
영혼을 탑재한 기계가 출현하는 순간 그 갈등은 현재의 인간간 계층/계급 갈등과 다를 것이 없다.

차뻭이 자꾸 ˝만국의 로봇들이여˝라는 멘트를 차용하는데
이것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아닌가?

다 떠나서 20세기 초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거칠때 프라하 모 빌라에 모여 이런 지적인대화를 나눈
그 유대인들이 너무 부럽다.
역시 하나님의 직계는 축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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