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최정수 옮김 / 부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사랑은 어떤 것일까?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연관되어있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게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있다. 정리는 느리지만 나름 꾸준히 철학스터디를 하고 있는데, <사랑>에 관한 챕터를 읽던 도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얇은 책을 들었다. 사실 작가가 구면이어서 집어 들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사르트르의 연인으로 더 잘 알고 있지만 사실 그녀의 책은 한 권도 접해보지 않았다. 모쪼록 읽게 된 책을 덮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서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였다.

책은 아주 얇고 심플하다. 인생의 가을 녘 서로가 몇 번째 일지는 모르지만 여튼 첫번째 사랑은 아닌 앙드레, 니콜부부가 앙드레의 딸인 마샤와 모스크바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아주 사소한 오해로 다투게 된다. 소설은 늙어감과 사랑함 그리고 외로움과 사회주의. 그 어딘가를 헤맨다.

표면만 보자면 노부부의 알콩달콩한 여행이야기이다. 다소 다투기도 했지만 그 다툼의 원인은 서로의 자식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 온전하게 부부끼리 있는 시간을 원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촉발된 다툼은 사실 말을 꺼내놓음으로써 종료된다. 그러나 그 일련의 과정이 '읽을만'하려면 역시나 매력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앙드레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인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자신이 여자임을 느꼈다. 그런데 앙드레가 너무나 잘생긴 낯모르는 청년을 데리고 왔다. 청년은 별생각 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그녀와 악수했고, 그 순간 뭔가가 뒤집혔다. 그녀에게 청년은 젊고 매력적인 수컷이었디만, 청년에게 그녀는 여든 살 늙은이 만큼이나 무성의 존재였다.<P.70>

무성의 존재가 된다는 것. 더 이상 '젊은'사람에게 여성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니콜.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동년배의 남자들 사이에서는 여자였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발휘되는 그룹이 존재함에도 다른 그룹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겨버리는 질투와 좌절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세대차이. 아주 얇은 책 한 권에서 발견한 세대의 차이는 간극이 분명하다. 이성간의 감정이 배제된 무성의 관계가 되어버리는 세대. 그 세대는 여성성 혹은 남성성 만큼이나 지성 역시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 교사였던 니콜과 교수 앙드레. 그들은 '젊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젊은이들은 가공의 영원을 앞에 두고 일거에 길 끝으로 건너뛴다. 하지만 나중에는 역사의 특별 지출이라 불리는 것을 추월할 힘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그들이 끔찍하게 자랐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에 의존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생각이 없었다. <P.97>

니콜은 분명 이름 모를 청년에게 무성의 존재임에서 나이 듦을 느꼈고 좌절했다. 그러나 앙드레는 젊은이의 행동에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했고, 더 이상 자신은 통하지 않는 뒷방 노인네라 느꼈다. 늙어감은 단절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육체적인 사랑이 불가능 함을 느꼈을 때. 그리고 세대가 단절됨을 느꼈을 때. 혹은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질투감을 느낄 때. 비교가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온 세계가 나의 늙어감을 외칠 때.

어린 시절의 추억은 왜 그토록 감동적일까? 시간이 끝없이 확장되기 때문이겠지. 저녁 시간이 멀리 사라져갔고, 그녀 앞엔 영원의 시간이 펼쳐져 있었다. <P.130>

나의 앞에 있는 시간이 내가 지나온 시간보다 짧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 나는 늙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게 되었다.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늙어감을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늙어감은 숨기게 되는 모순점이 생길 때. 앙드레는 젊은이들의 지식에는 빈 공기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의 딸에게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으며 모스크바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일하고 있음'을. 자신은 '한가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통속적인 표현이지만 노인의 지혜와 청년의 추진력이 조화로운 세계.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긴 세월과 이상에 대해 말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해줄 사람도 필요하다. 러시아어를 모르면서 러시아 뉴스를 들을 수 없듯이.

"넌 사유재산을 증대시키면서 사회주의를 제대로 건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저는 인간이 사회주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단기적으로 개인의 이익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마샤가 말했다. <P.62>

앙드레와 니콜은 모스크바에서 오해로 인하여 단절되었고,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몇시간을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끝났음을 직감하게 되지만 그보다 더 느리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아직 그들은 사랑하고 있음을. 그게 참 다행임을 느끼게 된다. 사랑은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진정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중 한 사람이 먼저 끝내버릴 수 있는 관계.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앙드레는 니콜이 아님을, 니콜은 앙드레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번은 없을 거야."

아마도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서로에게서 멀어져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 앙드레는 질문할 것이고, 니콜은 대답할 것이다. <마지막>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에로스의 조건으로 타자의 비 대칭성과 외재성을 내세운다. 사랑은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나의 밖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타자를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사랑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잔인하게도 같은 시간에 끝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아주 어리석은 실수로 억지 부리는 상대가 아주 밉지 않은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예술의 영역 어딘가인 것이다.

 

책에서, 앞으로 써먹고 싶은 문장을 찾았다.

Q. 여행을 왜 다니나요

그를 흥분시키고 겁먹게 하는 모험, 발견이라는 모험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대단한 인물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라는 존재의 진실과 그 자신의 진실이 그에게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진실은 지구 전체에 막연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그 진실을 알려면 시대와 장소들을 꼼꼼히 살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와 여행을 좋아했다. <P.21>

Q. 책은 왜 읽나요

이것이 문학의 이점이야, 니콜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안에는 타고난 표현들이 잠재되어 있다. 이미지들은 퇴색하고, 왜곡되고, 소멸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구멍에서 낡은 표현들을 그것이 쓰였던 용법 그대로 찾아냈다.<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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