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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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만큼이나 독서 편력도 심한 나는 부끄럽지만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는 타입은 아니다. 고작 초딩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해리포터>가 아마 가장 긴 독서력일 것이다. 하지만 제법 가볍기도 하고, 그래서 더 무거운 한병철의 책은 한 번씩 잊을 만 할 때마다 꺼내어 보게 되는 것이 있다. 소설책도 가십거리도 아닌데 쉽게 꺼내볼 수 있는 철학서라니. 그 정도로 어쩌면 내용은 단순하고 명쾌한 내용일 수 있으나 왠지 모르게 중독되는 무언가가 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문학적인 어떤 것이 내재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전공한 것은 금속공학이라니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금속공학과 철학 사이엔 무엇이 있었을까? 기회가 된다면 한번 파헤쳐 봐야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저 독자로서 저자의 생각에 표류하고 싶다.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한다. 구속성은 충실함을 요구한다. 충실함은 구속성을 전제로 한다. 충실함은 무조건적이다. 여기에 충실함의 형이상학이, 나아가 초월성이 있다. (...) 미는 만족의 대상으로, 좋아요의 대상으로, 임의적이고 편안한 것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이런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있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마지막>

이번 책의 키워드는 <매끄러움>이다. 이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에 녹아있는 위험성이란.

매끄러운 것 역시 투명성과 비슷한 속성을 같는다. 모난 곳이 없고 끝이 없이 유려하다. 같은 것을 반복하고 쭉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그곳에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끄러져 나갈 뿐이다. (근데, 내가 이거 제대로 이해한 게 맞겠지??)

기가막힌 생각이다. 최근 읽은 미학에 관한 책들 중에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고 있다.

현대사회는 알게 모르게 동일성을 추구한다. 모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나름 모났다 하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정도로만 모가 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이미 바틀비 이전에 끝난 듯 하다.​

한병철의 책은 <투명사회>,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 <피로사회> 정도는 내용을 복기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드를 잡아가며 읽었다. 사실 그 외의 책들은 읽긴 했으나 기억나지 않거나 음, 역시 철학자는 알수없는 사람이군 하고 넘겼었던 것 같다. 아무튼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책들을 '문학적'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고민을 해 보았는데 작가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들리는 말의 위험함을 잡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투명성에는 향기가 없다.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직접적인 반응과 욕구의 해소 역시 외설적이다. 프루스트에게 "즉각적 향락"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무언가의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회상을 통해 나타난다.<투명사회/P.69>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을증도,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피로사회/P.22>

<투명함>,<긍정성>,<유대감> 등 충분히 긍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많은 단어들. 저자는 그 속에서 다른 의미를 잡아낸다.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고 그 깊이가 없다는 것을. 긍정적인 것은 되려 폭력이 되어 나를 다그치고 있음을. 그리고 유대감 속에 빠져 죽은 나에 대해서. 제일 먼저 접했었던 것은 <투명사회>였는데, 한동안 친구들에게 저자의 시선을 엄청 많이 써먹었었다.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는 투명의 그늘에 대해서 말이다.

​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글쓴이는 기존의 책과 일괄되어 있는 생각으로 현대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에로스의 종말>을 고했듯, 미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부분이 사라져버렸음을 지적한다. 모든 것을 좋아하고 부정하지 않는 긍정사회는 아름다움 마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매끄러움>은 곧 <좋아요>이며, <보편적인 무언가>이고 <모두가 인정한 편리함>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체주의적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P.411>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P.415>


책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려본다. 사실은 <키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평준화 된 인간을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투명사회>를 이번에는 언뜻 보기에는 아름다워보이는 <매끄러움>으로 지적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있는 아름다움은 한없이 다듬어진 무엇인가이다. 물론 그건은 아름답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사회화된 사람들의 개성없는 판단일지도 모를 일이다. 매끄러움의 세계에는 질문을 던지는 자가 없다.

이상적인 소비자는 개성이 없는 인간이다. 이 개성없음이 무차별한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 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 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P.75>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할 필요는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개인 간의 기준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유난히도 아름다움의 기준이 맞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파리의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의 카피 옷을 구할 수 있고 음악은 어디에나 흐르고 있으며 핸드폰 안에서는 계속 아름다움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들을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키치'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독서력이 조금씩 늘면서 편견이 생긴다는 것을 최근 느껴가고 있는데,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으면서 필연적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났다. 키치에 갖힌 사람들. 그게 싫어서 탈출했던 사바나는 다시 또 키치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키치의 왕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키치는 자꾸 생겨난다. 새로운 매끄러움 역시 자꾸 생겨난다. 하지만 그 키치의 왕국의 왕을 사랑하게 된 사바나처럼 나도 매끄러움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 없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없다. 그것에는 어떤 포르노그래피적 성질이 있다. 미는 병이다. "건강의 창궐은 그 자체로 언제나 병이기도 하다. 이 병의 해독제는 자신을 읫기하는 병이며 삶 자체의 제한이다. 그런 치유력을 지닌 병이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삶을 저지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쇠멸을 저지한다. 삶만을 추구하느라 병을 부정하면, 그렇게 실체화된 삶은 다른 계기로부터 맹목적으로 분리되어 바로 이 계기로 파괴적이고 악한 것, 뻔뻔스럽고 우쭐대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파괴적인 것을 증오하는 자는 삶 또한 증오해야한다. 오로지 죽은 것만이 왜곡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의 비유다."<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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