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2
스탕달 지음, 김붕구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스탕달은 적과 흑의 모티브를 범죄와 수사를 다루는 잡지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그르노블 근처 브랑그에 사는 대장장이의 아들인 앙투안 베르테는 한 신부의 추천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한다. 허약한 건강이 이유가 되어 학교에서 나오게 되자 그 20세의 청년은 미슈 가의 가정교사 자리를 얻지만, '무례하게' 미슈 부인에게 접근했다 하여 해고된다. 그는 미슈 부인에게 모욕당했다고 느껴, 브랑그에서 미사중에 그녀를 쏜다. 1828년 2월 23일 그는 처형된다."  

 스탕달은 이 재판 사건으로부터 기본 구조를 취했다. 그래서 크게 보았을 때에는 구성상의 무리가 없지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 들어가 있기도 해서 가독성이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 아마도 작가가 실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상과 주제를 넣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과 흑]에는 크게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 정치적 견해 그리고 연애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표면상으로는 연애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 같지만, 줄리앙의 연애를 통해서 작가는 하나의 개인적인 사랑 안에 사회와 정치가 들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레날부인과의 사랑도 그렇지만, 마틸드와의 사랑은 더더욱 그렇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그는 지금은 사회를 상대로 싸우려는 불행한 사람'(P 353)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잘 알고 시작했던 줄리앙의 자기비하, 열등의식은 소설 전반에 퍼져있다.  그는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자유주의자임에도 신분사회에서는 한치도 자유롭지 않은 야심가였다. 당시의 상황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는 소설이 진행되어 가는 내내 수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적과 흑]을 다 읽고 나면, '흑'은 소설 속에 명징하게 잘 버무려져 있으나, '적' 또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줄리앙은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군인인 '적'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검은 옷의 가정교사와 검은 옷의 사제와 검은 옷의 비서로 밖에 사회에서 존재한다. '적'이 나아가고자 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꿈이라면, '흑'은 명민한 그에게 사회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가정교사가 된 것도 아버지와 레날씨의 결정이었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레날부인과의 관계가 들통나면서이고, 라 몰 후작 비서가 되는 것도 피라르 신부에 주선에 의해서이다. 마틸드 양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녀가 먼저 던지 편지 덕분이고, 레날부인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후작에게 보낸 부인의 편지 때문이다. 작가는 줄리앙을 야심과 욕망 그리고 열등감에 불타 있는 사람으로 그리지만, 그만한 야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해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그리지는 않고 있다. 자기 길을 개척해나가지 않는다. 소설 내내 수동적이었던 줄리앙이 딱 한 번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건 바로 '사형'이다. 그런데 야심가인 그가 레날부인을 총으로 쏜 일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야심가인 줄리앙은 언제 야심을 보여줄 것인가, 줄곧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라 몰 후작을 따라 비밀 모임에 암기를 위해 갔을 때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벌어질 줄 알았지만, 그 사건도 거기에서 그쳤다. 내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줄리앙은 여전히 신분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고,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약하다는 것 뿐이었다.)    

한편으론, 야심가임에도 계급의 벽을 넘지 못할 정도의 사회에서라면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부릴 수 있는 야심이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사형'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라면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도 스탕달의 [적과 흑]도 사회에서 우대받는 권력, 명예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 안에서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므로 더 아쉽다.  계급사회 안에서 죽음 밖에 답이 없다면, 완전히 다른 방향, 사회가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난 다른 식의 자기만의 야심을 펼쳐보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신분사회라는 것 때문에 야심가 줄리앙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시대의 한계라면, 스탕달이 이렇게 밖에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시대의 한계일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스탕달은 나폴레옹을 정말 좋아하긴 한 모양이다. 그의 말까지 자신의 소설에 변용하여 쓸 정도이니 말이다.

"내 안에는 다른 두 인간이 있다. 머리를 가진 인간과 가슴을 가진 인간" - 나폴레옹

"사실 사람이란 저마다 자기 속에 두 사람이 들어 있지. 대체 그 중의 누가 지금의 나로선 가슴 아프고 꿈 같은 이런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524 - <적과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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