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흔에 읽는 융 심리학 -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을까
제임스 홀리스 지음, 정명진 옮김, 김지용 감수 / 21세기북스 / 2025년 2월
평점 :
융을 만난 지 오래되었다. 나의 박사논문은 융의 개성화에 근거한다. 인종적 수치심을 치유하는 근거로 개인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 과거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토니 모리슨은 그 작업을 리 메모리라고 불렀다. 인종은 개인의 존재 근거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인식은 부모 이전에 나온 것이므로 사회에 깔려 있는 이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식 있는 가족과 공동체라면 여기에 대비해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것은 나의 것을 알아보는 눈이고 나의 가족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시선이며 나의 인종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다.
오늘 다시 융을 읽는다. 융 자신의 저작물은 아니다. 융 학파는 다양한 학설을 내놓았는데 그 학설들은 융에게서 비롯한 것으로 임상을 통해 확립된 것이다. 융 학자들은 보다 상세한 이론을 만들어왔고 그중 한 명인 제임스 홀리스가 내놓은 책이 『마흔에 읽는 융 심리학』이다. 마흔 살이 왜 중요한가. 마흔은 중년이다. 융은 중년을 35세부터라고 보았다. 그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사회적 환경이 달라 중년이라고 보는 연령은 달라졌다. 달라졌다고 해도 중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융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개성화라고 보는데 그 개성화는 중년에 관한 것이다.
즉, 중년에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사회에 적응하고 직장을 잡아 삶을 꾸려가는데 온 힘을 다해왔다면 그렇게 살아온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 드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면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알지 못하면 여태까지의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게 된다. 벗어나고 싶지만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방식이 익숙해서이고 새로이 시작하는 일이 두려워서이기도 하다. 두렵다는 것, 왜 새로이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가? 그 역시 내 안에 답이 있다.
마흔의 심리학은 바로 그런 점들을 돌아보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을까" 이다. 제 2장은 그야말로 왜 나는 현재의 이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다. 2장의 제목은 "우리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이다. 오늘 내가 멈춘 부분은 바로 이곳이다. 세상에 상처를 입을까 봐 순응하는 사람들 이야기, 바로 나의 이야기다. '순응'이란 언제나 과도하게 짓누르는 세상의 힘에 대한 반응으로, 순응은 학습된 반응이며 가끔 문명의 존속에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렇다. 우리는 세상의 요구에 혹은 기대에 부응해 살아갈 수 있다. 게다가 조직,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살아날 수 있으므로 문명 존속에 분명히 필요하다. 세상은 힘이 세다. 그러니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줘라'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배워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거듭된 순응이 우리 내면의 욕구를 초월하고 개인적 정체성을 침해하면 끔찍한 결과가 초래된다.(87)' 순응 반응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순응 반응은 너무 흔해져서 '공동의존'이라는 병리적 이름이 되었지만 미국 정신의학회는 진단명에 공동 순응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너무나 흔하고 평범하기 때문이다. 이 순응은 "자신에 대해서는 무력한 사람, 타인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강한 존재라고 하는 반사적인 가정에 기초한다."
중년에 이른 나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현재도 그러하다.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는 현재는 적응하기에 바빠서 혹은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게끔 만들어서 언제나 현재를 살아내기에 급급했다. 지금의 현실이 과거의 역학에 의해 전복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착하게 구는 방식, 내가 택해왔던 그 행동은 더 이상 '착하지' 않다. 우리를 잡아 내리는, 여전히 이 상태에서 헤매게 하는 마음의 늪지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영적 향기를 찾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