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 두 돼지 이야기
필 비셔 지음, 저스틴 제라드 그림, 정모세 옮김 / IVP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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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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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초대장을 보내셨다.

시드니와 노먼에게처럼, 나에게도 말이다. 다만 하늘색 편지 봉투에 담긴 어여쁜 초대장은 아니었다. 고통. 고통이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쑥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싱긋 웃을 수 없었다. 노먼과 달리. 오히려 안절부절못했다. 시드니처럼 말이다. 마음을 담아, 하나님이 보내신 초대장을 모르쇠 할 순 없었다. ‘가야지. 그래 가야지... 가야해. 가야한다니까? 하나님이 부르시잖아.’

 

생각과 달리 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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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하나. 날 지독히도 괴롭혔던 성인 여드름. 두꺼운 화장을 덧대어 가리고, 가리고 또 가려야 했다. 양 볼 가득한 여드름을 사람들로부터. 그러다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제야 피부과를 찾았다.

 

내 한 몸 누울 수 있는 작은 침대에 눕는다. 간호사의 분주한 손길과 함께 차갑고 뜨거운 것이 반복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나면, 바늘과 차가운 철제 도구들이 얼굴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이러다 얼굴이 구멍 나고 말거야.’ ‘뼈가 부서질 것 같아.’ ‘아아! 아파!’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는 시간.

 

한 뼘 되는 침대 위, 간호사의 매정한 손아래 명확해지는 것은 난 환자라는 사실. 화장을 덧대어 가리려고 애썼지만 거기선 도무지 가릴 수 없다. 간호사가 짓누르는 얼굴의 한 곳 한 곳을 감각하며 이렇게도 환부가 많았다는 것을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받아들일 수밖에.

 

환부를 확인하고, 낫기 위해 전문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그리고 환부를 하나하나 도려내는 고통. 다시는 찾아가고 싶지 않은 피부과, 눕고 싶지 않은 치료실.

그 곳이 떠올랐다.

 

하나님 앞에서 주로 많이 울었기에. ‘내가 이렇게나 아팠구나.’ 모른 척 없는 척 숨겨진 이면이 다 드러나고, 사실은 내가 슬픈 마음 있는 자 몸과 영혼 병든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기에.

 

하나님의 초대장이 달갑지 않았다. 다이어리에 꽂아 놓고 펴보지 않았다. 오래도록 모른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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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것보다 기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순간이 되면 떠나야 할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영혼의 리더십 p123)

 

그제야 염치없이 하나님 앞에 기어 나간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절 부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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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난 착하고 훌륭한 돼지 노먼과 같았다. 어른들이 아주 예뻐한, 사람들의 신임을 듬뿍 받는. 몸을 쭉 펴고 자랑스러운 듯 걸었다. 우쭐대면서 말이다.

 

분명 하나님도 좋아하실 거야.’ 하나님도 나를 좋아하시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불과 1,2년 되었을까. 시들시들해진다. 자꾸만 쪼그라드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입사를 하고, 공식적으로 주어진 포지션을 담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분명 인턴 때랑 비교했을 때 업무는 별반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어른 세계의 규칙이라든가 제도라든가 일정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따라잡기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정말로 시드니처럼 생각했다. 어떤 때는 제법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금세 이런! 또 실수를 했네.’하고 실망할 때가 많았다.

 

하나님도 실망하셨을 거라고 생각했고, 누구보다도 나에게 실망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장 나지 않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실수하면 안 돼. 잘해야 해.’ 심혈을 기울일수록 몸은 경직되어만 갔다.

 

어깨에 멘 무거운 책가방을 꼭 붙들고 절대 내려놓지 않는 여덟 살 꼬마아이. 나를 초대하신 그 방안에서 내가 발견한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늘 절망과 근거 없는 자신감 사이를 오갈 것이다. (기도일기 p45)

정말 그랬다. 그렇게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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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엉엉 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를 알고 나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나의 삶을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즉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삶 혹은 내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을 구속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있을 나를 아셨고, 구체적인 아름다움과 깨어짐을 간직한 관계들 그리고 구체적인 죄와 어려움을 아셨다. (오늘이라는 예배 p30)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옷으로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실수하고 허둥지둥 거리는 나를 있는 그대로 아셨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해주신다.

 

초라한 나, 실수투성이 나를 인정하면 모든 것이 끝장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도리어 경직된 근육들이 조금씩 풀어지고 잔뜩 주고 있는 힘을 뺄 수 있다. 하나님의 그늘 아래 내 모든 것 내려놓으라고, 가방을 받아주시고 어깨를 주물러 주신다.

 

네가 와 줘서 기쁘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네게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반갑다. 그리웠나보다.

하나님의 온화한 눈빛이 나를 발가락 끝까지 따뜻하게 만들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정도야 다를 수 있겠지만 실수하고 허둥지둥 거리는 나는 여전하다. 다시 스스로가 싫어질 무렵, 스스로에게 실망할 무렵이면 하나님의 눈동자에서 보았던 따뜻함을 다시금 떠올리곤 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셔.’ 포기 없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끈질긴 미련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리라 나는 너를 사랑하리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못 잊어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내가 너를 상하게 하리요 욕되게 하리요

아무도 너를 만질 수 없음을

내가 너를 사랑하리라

 

[내가 너를 사랑함이라, 김도현1늘 울고 싶은 마음들에게’]

 

(굵은 글씨는 책에 나온 말들을 그대로 혹은 변경하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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